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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5000의 빗장을 열 열쇠: '거수기'를 멈춘 스튜어드십 코드가 온다

AI News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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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00 포인트라는 신기루, 그리고 '박스피'의 유령

2026년 1월의 여의도 증권가, 점심시간마다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표정에는 미묘한 피로감이 서려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코스피 지수는 여전히 3000선의 턱걸이와 이탈을 반복하고, 정부가 호언장담했던 5000 포인트라는 숫자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멀어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합니다. 10년 차 개인 투자자 김민성(42) 씨는 "나스닥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선 허탈함을 느낀다"고 토로합니다. 그의 포트폴리오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한때 '국민주'라 불렸던 종목들은 여전히 매수가를 회복하지 못한 채 파란불을 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독한 '박스피(Boxpi)'의 유령은 단순한 경제 성장률의 둔화 탓이 아닙니다. 2025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경제성장률 방어 수치와 수출 실적은 견조했지만, 주가는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삼성전자는 TSMC가 되지 못했는가?"

블룸버그(Bloomberg)가 집계한 2024년 말 기준 데이터에 따르면, 대만 TSMC의 주가수익비율(PER)은 삼성전자의 두 배를 상회했습니다. 두 기업 모두 반도체라는 '산업의 쌀'을 생산하지만, 시장이 부여한 가치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의 최근 아시아 시장 보고서는 이 격차의 원인을 기술력의 차이가 아닌 '자본 배치의 효율성'과 '주주 환원 정책의 투명성'에서 찾았습니다. TSMC가 벌어들인 돈을 투명하게 배당하고 자사주를 소각하며 주주의 몫을 늘리는 동안, 한국의 대기업들은 과도한 현금 유보와 불투명한 승계 구도, 그리고 문어발식 중복 상장으로 주주 가치를 희석시켰다는 지적입니다.

위 차트는 그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밸류업(Value-up)' 프로그램을 외치며 세제 혜택을 논할 때, 정작 시장이 원했던 것은 거창한 부양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투자한 회사의 이익이 부당하게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신뢰, 그리고 경영진이 딴짓을 할 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진짜 주인'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지금 코스피에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성장률 숫자가 아니라, 훼손된 주주의 권리를 복원하는 '게임의 규칙' 변화입니다.

2. '거수기'가 만든 코리아 디스카운트

이러한 불신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요? 여의도의 벚꽃이 피기 전, 3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 열리는 주주총회장은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총장은 흔히 '20분의 요식행위'로 끝납니다. 2025년 3월,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시가총액 10조 원 규모의 A그룹 계열사 정기 주주총회를 기억하십니까? "이의 없으십니까?"라는 의장의 물음에 300석을 채운 대리인들의 침묵이 흘렀고, 의사봉 소리는 단 15분 만에 일곱 번 울렸습니다. 이날 통과된 안건 중에는 대주주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일반 주주의 지분 가치를 희석시킬 우려가 다분했던 '전환사채 발행 한도 확대' 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스모킹 건(Smoking Gun)'입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분석한 '2025년 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 내역'에 따르면, 국내 자산운용사와 연기금이 상장사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비율은 무려 98.2%에 달했습니다. 이는 같은 기간 미국 기관투자자들의 찬성률인 70%대와 비교하면 기형적으로 높은 수치입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를 도입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기관은 경영진의 결정에 무조건적인 '예스'를 외치는 '거수기' 역할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입니다.

기관의 침묵은 곧장 개인 투자자의 계좌 손실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2022년과 2024년, 배터리와 바이오 섹터에서 반복된 '물적분할 후 재상장' 사태를 목격했습니다. 알짜 사업부를 떼어내 자회사를 만들고 이를 다시 상장시킬 때, 모회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쳤습니다. 당시 30대 직장인 김민수 씨(가명)는 "내가 투자한 회사의 핵심 사업이 떨어져 나가는데, 내 돈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는 왜 찬성표를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보고서가 지적하듯, 기관 투자자들이 경영진의 사익 편취나 비효율적인 자본 배치를 견제하지 않을 때, 기업의 자본비용은 상승하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배 미만으로 고착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수기'가 만든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실체입니다. 단순히 북한 리스크나 낮은 배당 성향 때문만이 아닙니다. 주식을 보유한 '진짜 주인'이 대리인(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하지 않는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제값을 지불할 리 만무합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2025년 하반기 아시아 시장 전략 보고서는 "한국 시장의 밸류업은 정부의 세제 혜택보다 기관 투자자들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 달려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3. [거울 효과] 일본은 어떻게 '잃어버린 30년'을 끝냈나

우리가 내부의 모순에 갇혀 있는 사이, 이웃 나라 일본은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습니다. "일본 주식은 죽은 돈이다." 2010년대 월가 펀드매니저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이 격언은 2024년 2월 22일, 니케이225 지수가 34년 만에 1989년 버블 경제 당시의 최고점(38,915)을 돌파하며 산산조각 났습니다. 많은 한국 투자자들이 엔저(Yen Weakness)를 일본 증시 부활의 일등 공신으로 꼽지만, 도쿄 현지에서 만난 골드만삭스 재팬의 전략가들은 고개를 젓습니다. 환율은 트리거였을 뿐, 화약고에 불을 붙인 건 도쿄증권거래소(TSE)의 서슬 퍼런 '회초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거창한 경제 성장률이 아닙니다. 일본의 2023년 실질 GDP 성장률은 1.9%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일본 상장사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9조 6천억 엔(약 87조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코스피 5000을 논할 때 반드시 들여다봐야 할 '거울'입니다.

2023년 3월, 도쿄증권거래소는 PBR 1배 미만인 기업들에게 "주가를 올릴 구체적인 방안을 공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한국 금융당국이 내놓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자율성에 무게를 둔 '당근'이라면, 일본의 방식은 명확한 '채찍'이었습니다. TSE는 개선 의지가 없는 기업을 관리종목으로 지정하거나 상장폐지까지 시킬 수 있음을 시사하며 경영진의 목을 죄었습니다. 이 충격 요법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만년 저평가에 시달리던 시민 시계(Citizen Watch)는 순이익의 100% 이상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쓰겠다고 발표했고, "현금을 쌓아두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던 일본 경영진에게 주가는 이제 관리해야 할 핵심 KPI로 격상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기업 지배구조의 고질병이었던 '모찌아이(상호주식보유)'의 해체 과정은 한국 재벌 체제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도요타자동차가 2,500억 엔 규모의 통신사 KDDI 지분을 매각한 사건은 "본업과 무관한 자산을 팔아 주주에게 돌려주라"는 시장의 요구를 수용한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JP모건은 이를 두고 "일본 주식시장의 주인이 '경영진의 친구들'에서 '수익을 쫓는 투자자'로 교체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4. [Case Study] 메리츠의 파격 vs 재벌가의 침묵

바다 건너 일본의 사례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우리 내부에도 희망의 증거는 있습니다. 2022년 11월, 메리츠금융지주가 던진 '원 메리츠(One Meritz)' 선언은 한국 자본시장 역사상 전례 없는 실험이었습니다. 대다수 재벌 그룹이 알짜 사업부를 물적 분할하여 '쪼개기 상장'으로 자본을 조달할 때, 메리츠는 정반대로 흩어진 자회사를 지주사 하나로 통합하고 상장 폐지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실험의 결과는 숫자가 증명합니다. 지난 3년여간 코스피가 박스권에 갇혀 횡보하는 동안, 메리츠금융지주의 주가는 3배 이상 폭등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실적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당기순이익의 50%를 주주에게 환원하겠다"는 약속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분기마다 이어지는 자사주 소각 공시가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조정호 회장은 자신의 지분율이 희석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업 가치 제고'가 결국 대주주의 이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시장에 입증해 보였습니다.

반면, '침묵하는 거인'들의 행보는 여전히 3040 투자자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2024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쪼개기 상장을 단행한 주요 대기업 10곳의 모회사 주가는 분할 상장 후 1년간 평균 30% 하락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기존 주주의 부(富)를 강탈하여 신규 투자자에게 넘기는 행위임에도, 경영진은 "신사업 투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로 일관해왔습니다. 메리츠의 사례는 '거버넌스(지배구조)가 곧 밸류에이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장의 신뢰를 얻은 기업은 PER 5배의 굴레를 벗어나 10배, 15배의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5. 국민연금, '큰 손'인가 '보이지 않는 손'인가

메리츠와 같은 사례가 확산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장의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가장 큰 주주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6년 3월, 국내 굴지의 대기업 H사의 물적분할 안건을 다루는 임시 주주총회장에서 소액주주들이 울분을 토할 때, 지분 9.2%를 쥔 '캐스팅 보터'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대리인은 침묵했습니다. 결과는 기권. 사실상의 방조였습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FnGuide)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는 280여 곳에 달합니다. 명실상부한 '자본시장의 대통령'이지만, 이 거대한 힘은 기이할 정도로 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와 '연금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프레임 사이에 갇혀 길을 잃었다고 지적합니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주문하면 재계는 "관치 금융"이라 반발하고, 물러서면 소액주주들이 "수탁자 책임 방기"라 비판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국민연금의 '전략적 모호성'이 결과적으로 지배주주의 전횡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입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이나 네덜란드 연기금(APG)이 투자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공개 서한을 보내고 이사 해임까지 요구하는 '행동주의'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한 선임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침묵하는 것은 기득권의 편을 드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습니다.

6. '무늬만 도입'을 넘어: 내실화를 위한 제언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열쇠는 정부의 밸류업 팜플렛이 아닌, 1,000조 원이 넘는 국민의 노후 자금을 굴리는 '진짜 주인'이 제 목소리를 낼 때 찾아집니다.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기 위해, 그리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우리는 선언을 넘어선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필요합니다.

첫째, '침묵의 투표'를 멈추고 의결권 행사 내역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미국 SEC가 'Form N-PX' 개정안을 통해 펀드의 투표 내역을 표준화된 양식으로 보고하도록 강제한 것처럼, 우리도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요 연기금과 운용사가 주주총회 직후 7일 이내에 찬반 여부와 '구체적인 찬반 사유'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해야 합니다. 투자자는 내 돈을 굴리는 매니저가 왜 경영진의 손을 들어줬는지 즉시 알 권리가 있습니다.

둘째, 의결권 자문사의 이해상충을 방지할 '방화벽'이 필요합니다. 기업의 ESG 컨설팅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당 기업의 주총 안건을 분석하는 기이한 구조를 끊어야 합니다. 컨설팅 부문과 자문 부문 간의 물리적, 정보적 차단벽(Chinese Wall)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기업이 자문사에게 컨설팅을 의뢰했는지 여부를 공시하게 함으로써 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야 합니다.

셋째, 기관 투자자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경영진의 뜻을 거스르는 반대표를 던졌다가 기업 탐방(IR) 기회가 막히거나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회의 결정이 주주가치를 훼손할 경우 이에 반대하지 않은 기관에게 책임을 묻고, 반대로 합리적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기관은 기업의 보복성 조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