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ALK.
tech

유전자가 운명이 아닌 데이터가 되는 세상: 영국 NHS의 실험과 한국 바이오의 미래

AI News Team
Aa

1. 서막: 보이지 않는 암살자를 찾는 '디지털 레이더'

2026년 1월, 런던의 아침 안개 속에서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던진 메시지는 명료했습니다. "암이 당신을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암을 찾겠다." 이것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역에서 수집된 수백만 명의 유전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세포가 악성으로 변이하기 직전의 '티핑 포인트'를 감지하겠다는 거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가까웠습니다. 통증이 느껴지거나, 혹이 만져지거나, 체중이 급격히 줄어든 뒤에야 병원 문을 두드리는 식이었죠. 하지만 NHS가 지노믹스 잉글랜드(Genomics England)와 협력해 구축 중인 이 데이터베이스는, 마치 적군이 국경을 넘기도 전에 움직임을 포착하는 고성능 레이더와 같습니다. 영국 보건부의 최신 백서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향후 5년 내에 1기 암 발견율을 현재의 50% 수준에서 75%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존율 통계의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딸이 '시한부'라는 절망적인 선고 대신, "초기이니 간단한 시술로 끝납니다"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디지털 레이더'의 등장은 의료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명의(名醫)가 환자의 안색과 맥박으로 병을 짐작했다면, 2026년의 의학은 30억 쌍의 염기서열이라는 방대한 데이터 바다에서 '암'이라는 신호를 걸러내는 정밀한 데이터 과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혁신의 파도가 한국에 닿았을 때, 상황은 묘하게 흘러갑니다. 서울의 대학병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수술 기기와 의료진을 보유하고 있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쌓인 전 국민 의료 데이터 역시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드웨어와 원유(데이터)는 이미 갖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원유를 정제할 '파이프라인'이 막혀 있다는 점입니다.

취재 중 만난 국내 한 대형병원 암 센터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 의사들이 유전자 데이터를 지도 삼아 암세포를 추적할 때, 우리는 개인정보보호법이라는 높은 담벼락 뒤에서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IT 강국'의 인프라가, 정작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데이터 쇄국'이라는 역설적인 족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시적인 시스템의 차이는 결국 개별 환자의 삶의 질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영국 런던의 진료 현장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2. 현장: '피 한 방울'로 미래를 읽다

런던 남서부, 암 치료의 최전선으로 불리는 로얄 마스든 병원(The Royal Marsden). 2026년 1월의 차가운 런던 아침 공기를 뚫고 들어선 진료실에서 만난 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복잡한 의료 장비의 숲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40대 초반의 교사, 엠마 톰슨(가명) 씨가 채혈을 마치고 가벼운 표정으로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제 가족력 때문에 언제 암이 발병할지 모른다는 시한폭탄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피 한 방울'이 제 딸아이의 미래까지 바꿔놓을 거란 확신이 듭니다."

톰슨 씨가 받은 검사는 단순한 혈액 검사가 아닙니다. 영국 NHS(국가보건서비스)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전장 유전체 분석(Whole Genome Sequencing, WGS)' 서비스의 일환입니다. 과거에는 수천 파운드의 비용이 들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던 이 검사가, 이제 런던의 주요 거점 병원에서는 마치 감기 환자가 청진기를 대듯 자연스러운 '표준 진료' 절차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장에서 목격한 NHS의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이었습니다. 톰슨 씨의 혈액에서 추출된 DNA 데이터는 곧바로 잉글랜드 게놈(Genomics England)의 중앙 데이터베이스로 전송됩니다. 담당 주치의인 제임스 앨리엇 박사는 모니터에 뜬 30억 쌍의 염기서열 분석 리포트를 보며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엠마 씨의 현재 질병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데이터는 영국의 '10만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축적된 수십만 명의 데이터와 즉시 대조됩니다. 그녀에게 어떤 표적 항암제가 들을지, 부작용은 없을지, 심지어 그녀의 자녀가 20년 후 어떤 질병에 취약할지까지 예측하는 것이죠."

이는 한국의 대형 병원들이 개별적으로 유전체 센터를 운영하며 데이터를 '사일로(Silo)'처럼 가두어 두는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영국 보건사회복지부(DHSC)가 2025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 단위의 데이터 통합은 희귀 질환 진단율을 40% 이상 끌어올렸고, 불필요한 항암 치료를 줄여 연간 수억 파운드의 재정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환자 한 명의 생존율을 높이는 것을 넘어, 국가 전체의 보건 리스크를 관리하는 거대한 '데이터 댐'이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앨리엇 박사는 한국의 의료 IT 기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도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한국의 진단 키트와 분석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데이터가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한다면, 그건 성능 좋은 스포츠카를 꽉 막힌 골목길에서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에서 데이터는 '환자의 것'인 동시에 '국가의 자산'입니다." 런던의 병원들이 데이터를 통해 국민의 수명을 설계하는 동안, 이 거대한 프로젝트 뒤에는 냉철한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3. 경제학: '아픈 사람'을 줄이는 것이 국가 경쟁력이다

런던 시티(City of London)의 금융가들은 NHS의 이번 결정을 단순한 의료 혁신이 아닌, '국가 재정의 구조조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영국 재무부가 승인한 예산안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이는 감상적인 복지 정책이 아닌 철저한 손익 계산의 결과값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암은 더 이상 의학의 영역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 재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부실 채권'입니다." 영국 보건경제학 연구소(OHE)의 최근 보고서는 말기 암 환자 1명을 1년 더 생존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1만 명의 시민에게 유전자 검사를 제공해 5명의 초기 암 환자를 찾아내는 비용보다 높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면역항암제, 예를 들어 '키트루다(Keytruda)'의 경우, 한국에서의 비급여 투약 비용은 연간 1억 원을 상회하기도 합니다. 반면, 이번 NHS 프로젝트의 핵심인 전장 유전체 분석(WGS) 비용은 기술의 발전으로 1회당 200달러(약 26만 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2024년 NHS 잉글랜드의 데이터에 따르면, 1기 대장암 치료 비용은 약 3,000파운드에 불과하지만, 4기로 진행될 경우 그 비용은 10배 이상 치솟습니다. 이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필사적인 경제 전략입니다.

한국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에게, 암 치료비의 급증은 건강보험 재정 고갈 시계바늘을 빠르게 돌리는 주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데이터 규제'라는 딜레마에 갇혀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이나 아산병원 같은 국내 대형 병원들이 보유한 암 환자 데이터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개인정보보호법이라는 높은 댐에 갇혀 썩고 있다는 것이 바이오 업계의 공통된 한탄입니다.

영국이 '바이오뱅크(Biobank)'를 통해 50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공공재로 만들어 제약사와 연구소에 개방할 때, 한국의 스타트업들은 데이터를 구하지 못해 해외 병원을 기웃거려야 하는 현실. 이것이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아픈 국민을 줄이는 것이 곧 세금을 아끼는 것이고, 그 세금으로 다시 R&D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영국은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시각 한국의 혁신가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요?

4. 한국의 거울: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새벽 2시가 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한 AI 신약 개발 스타트업의 사무실. 김민수(가명, 38) 대표의 모니터에는 한국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의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영국 '바이오뱅크(UK Biobank)'의 접속 화면이 띄워져 있습니다. "한국 의료 데이터는 '그림의 떡'입니다. 국민건강보험 덕분에 데이터의 질과 양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지만, 가명 처리를 해도 반출이 까다롭고 연구 승인에만 수개월이 걸리니까요. 차라리 돈을 내고라도 바로 쓸 수 있는 영국 데이터를 쓰는 게 속 편합니다." 김 대표의 자조 섞인 한탄은 'IT 강국'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한국 바이오 산업의 서늘한 민낯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기묘한 역설 위에 서 있습니다. 영국이 500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통합해 국가 차원의 '암 예방 방화벽'을 구축하는 동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다는 건강보험 공단 서버 속에 5,000만 국민의 데이터를 가둬두고 있습니다. **한국바이오협회가 2025년 발간한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72%가 산업 성장의 최대 걸림돌로 '데이터 규제 및 인허가 절차'를 꼽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업의 불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데이터가 '국민의 생명'을 지킬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영국의 NHS가 유전자 DB를 통해 '발병 전 관리'라는 선제적 리스크 관리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 우리는 여전히 '발병 후 치료'라는 20세기형 모델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의 최근 분석은 이러한 격차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영국이 유전체 분석을 통해 희귀질환 진단율을 40% 가까이 끌어올리는 동안, 한국은 여전히 비급여 항목의 장벽과 개인정보보호법의 모호한 가이드라인 사이에서 유전체 검사의 대중화가 지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최고급 스포츠카를 차고에 넣어두고, 기름이 아까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꼴입니다. 한국의 의료 인프라와 IT 기술력은 이미 세계적 수준입니다. 전국 어디서나 1시간 이내에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접근성, 전 국민의 진료 기록이 디지털화된 건강보험 시스템은 구글이나 애플조차 탐내는 자산입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이의 미묘한 부처 간 칸막이, 그리고 의료 영리화 논란으로 번질까 우려해 빗장을 걸어 잠근 사회적 합의의 부재가 이 거대한 자산을 '디지털 수장고'로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가장 큰 장애물은 기술이 아닌, '보안'이라는 이름의 두려움입니다.

5. 윤리와 딜레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

"당신의 비밀번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유전자는 바꿀 수 없습니다."

2023년, 런던에서 만난 제노믹스 잉글랜드(Genomics England)의 한 보안 책임자가 던진 이 말은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의 본질적인 딜레마를 관통합니다. 영국이 500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모으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터져 나온 질문은 "이 데이터가 보험사의 손에 들어가 내 보험료를 올리거나, 고용주의 손에 들어가 채용을 거부하는 데 쓰이면 어떡하나?"였습니다.

이는 기우가 아닙니다. 2015년 미국 건강보험사 앤서(Anthem) 해킹 사태로 8천만 명의 의료 정보가 유출되었던 사건은 여전히 '디지털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NHS는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 '데이터의 댐'을 쌓는 대신 '데이터의 요새'를 짓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바로 '신뢰할 수 있는 연구 환경(TRE, Trusted Research Environment)'입니다.

NHS의 접근 방식은 도서관의 '대출 불가, 열람 전용' 시스템과 유사합니다. 연구자들은 데이터를 다운로드해 자신의 컴퓨터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오직 승인된 클라우드 환경 내에서만 데이터를 분석하고, 반출할 수 있는 것은 익명화된 통계 결과뿐입니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잠겨진 상자'에 가깝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의 이중 규제, 그리고 시민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이라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익명화를 거친 가명 정보조차 활용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기술은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동형암호(Homomorphic Encryption)' 기술은 암호화된 상태 그대로 데이터를 연산할 수 있게 해줍니다. 202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동형암호를 적용한 유전체 분석은 개인 식별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입니다. 영국 NHS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투명성이었습니다. 한국이 바이오헬스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규제 완화라는 구호가 아니라, "내 유전자 정보가 나를 해치지 않고 인류를 구하는 데 쓰인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투명한 보안 거버넌스'입니다.

6. 미래 전망: 2030년, 당신의 건강검진표는 어떻게 바뀔까?

만약 우리가 이러한 규제와 두려움을 넘어선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2030년 1월의 어느 아침, 서울 광화문의 한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인 45세 박민성 씨가 스마트폰 알림을 확인하는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2030 정밀 건강 리포트'입니다.

빨간 글씨로 '고혈압 주의', '간수치 상승'이 적힌 성적표 같은 건강검진 결과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미래 예보'가 뜹니다.

"박민성 님의 유전체 분석 결과, 한국인 상위 5%에 해당하는 대장암 발병 리스크가 감지되었습니다. 다만, 귀하의 현재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데이터와 결합 분석한 결과, 향후 3년 내 발병 확률은 '낮음'으로 재조정되었습니다. [권고] 기존 5년 주기의 대장내시경을 2년 주기로 단축하고, 처방된 맞춤형 유산균 B-Type을 섭취하십시오. 이를 준수할 시 발병 위험도는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공상과학이 아닙니다. 영국 NHS가 현재 실현하고 있는 모델이자, 한국의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K-DNA)'이 목표로 하는 2030년의 모습입니다. 의료의 패러다임은 '증상 치료(Cure)'에서 '데이터 기반 예측(Care)'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2030년의 병원은 아픈 뒤에 찾아가는 '수리점'이 아니라, 내 몸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관제 센터'가 될 것입니다.

결국 2030년, 당신의 건강검진표는 단순한 '결과 통보서'가 아닌, 인생이라는 긴 항해를 위한 정밀한 '네비게이션'으로 바뀔 것입니다. 영국 NHS가 보여준 것처럼, 유전자 데이터는 단순한 생물학적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안보 자산이자,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대한민국을 지탱할 가장 강력한 사회 안전망입니다. 이제 질문은 "기술이 가능한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데이터를 생명처럼 다룰 준비가 되었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