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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지갑, 마른 몸: 비만 치료제가 바꾼 대한민국 소비 지도

AI News Team
마른 지갑, 마른 몸: 비만 치료제가 바꾼 대한민국 소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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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약국 오픈런: 희소성 경제의 부상

2026년 1월 26일 월요일 새벽 5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유명 의원 앞. 영하 10도의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지만, 롱패딩으로 무장한 30여 명의 시민들은 미동도 없이 긴 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시간대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메우던 인파는 샤넬이나 롤렉스 매장의 '오픈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목표는 명품 가방이 아닙니다. 바로 펜 한 자루 크기의 주사제, '위고비(Wegovy)'입니다.

"지난달에는 30분 늦게 나왔다가 번호표도 못 받고 돌아갔어요. 웃돈을 얹어줘도 못 구하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대기열 앞쪽에 서 있던 30대 직장인 김 모 씨의 말은 현재 대한민국 다이어트 시장의 기형적인 수급 불균형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2026년 현재, 국내 비만 치료제 시장은 단순한 의약품 소비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희소성 경제(Scarcity Economy)'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식약처의 공급 부족 경고에도 불구하고, 주요 강남권 클리닉에서는 입고 소식이 들리자마자 10분 만에 물량이 동나는 현상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소비 패턴의 구조적 변화를 암시합니다. 과거 2020년대 초반, MZ세대의 소비 트렌드가 '오마카세'와 '파인다이닝'으로 대표되는 미식 경험과 순간의 만족에 집중되었다면, 2026년의 소비는 '고비용 자기 관리(High-cost Self-maintenance)'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2025년 가계 소비 지출 동향'에 따르면, 2030 세대의 외식 및 주류 지출은 전년 대비 8% 감소한 반면, 의료 및 건강 관리비 지출은 14% 급증했습니다. 이는 한정된 가처분 소득 내에서 다이어트 주사제라는 고가의 고정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젊은 층이 스스로 식비와 유흥비를 줄이는 '강제적 긴축'을 선택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청담동의 한 성형외과 원장은 "이제 체중 감량 약물은 단순한 치료제가 아닌, 100만 원짜리 명품 스니커즈보다 더 강력한 신분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맛집 탐방 대신, 아무나 구할 수 없고 아무나 지속할 수 없는 '의학적 마름'이 새로운 럭셔리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암암리에 형성된 2차 시장에서 정가의 1.5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은, 이 약물이 가진 사회적 지위재로서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텅 빈 냉장고: 장바구니 물가의 역설

이러한 거시적 변화는 개인의 미시적 일상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판교의 IT 기업에서 근무하는 38세 김민준 씨의 스마트폰 결제 내역은 지난 1년 사이 기이할 정도로 단순해졌습니다. 주 3회 이상 배달 앱을 통해 주문하던 치킨과 떡볶이 결제 건수는 '제로'에 수렴했고, 대형 마트의 온라인 장바구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가공식품과 탄산음료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고함량 단백질 쉐이크와 신선한 샐러드 채소, 그리고 한 달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GLP-1 계열 비만 치료제 처방 비용입니다.

김 씨는 "단순히 식욕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식품을 대하는 뇌의 보상 기전 자체가 변한 기분"이라며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대용량 과자를 샀다면, 이제는 그 돈을 나 자신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주요 유통사가 공동으로 분석한 '2026 유통 소비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비만 치료제 보급률이 급격히 상승한 지난 18개월간 대형 마트의 고열량 가공식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4.2% 감소했습니다. 특히 '중독적 소비'를 유도하던 스낵류와 가당 음료의 하락 폭은 20%를 상회합니다. 반면 저칼로리, 고단백, 기능성 원료를 강조한 이른바 '식단 관리' 카테고리의 매출은 35% 이상 급증하며 장바구니의 주도권이 완전히 이동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만 치료제 사용 전후 품목별 구매 빈도 변화 (Source: 2026 유통 소비 실태조사)

식품 및 유통 업계 투자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식품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균열'로 규정합니다. 과거 불황기에는 저렴한 탄수화물 위주의 가공식품 소비가 늘어나는 '라면 효과'가 공식처럼 통용되었으나, 2026년 현재는 고가의 약물을 통해 식욕을 통제하고 남은 가용 소득을 더 고품질의 소량 식사로 전환하는 '프리미엄 축소 소비'가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CJ제일제당이나 농심과 같은 전통적인 식품 거물들에게는 가혹한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치맥'의 위기: 회식 문화의 종말과 새로운 절제

식탁 위의 변화는 곧바로 자영업 생태계의 지각 변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서울 마포구에서 10년째 프라이드치킨 전문점을 운영하는 이호철 씨는 최근 금요일 밤의 풍경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체감합니다. 과거라면 자정까지 쉼 없이 울려 퍼졌을 배달 알람 소리가 밤 10시를 기점으로 잦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배달료 인상 때문인가 싶었지만, 단골손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예 '야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있더군요." 이 씨의 말처럼,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불리던 '치맥'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는 2024년 말부터 본격화된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대중화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하는 문화적 상징인 '밤 문화'를 재편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통계청의 '2026년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외식 및 배달 서비스 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14.2% 감소한 반면, 보건 및 자기계발 관련 지출은 22.1% 급증했습니다. 소비의 축이 '입안의 즉각적인 즐거움'에서 '장기적인 신체 관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식품산업통계정보(FIS)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주요 주류 업체의 유흥 채널 매출은 지난 2년 사이 18%가량 위축되었습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고칼로리 음식과 알코올이 주도하던 밤의 경제가, 약물을 통해 식욕을 통제하고 그 보상으로 얻은 건강한 신체를 과시하는 '절제 경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가계 지출 구조의 역전: 배달 음식 vs 건강 관리 (Source: 2026 KREI Consumer Report)

옷장의 르네상스: S사이즈가 주도하는 패션 혁명

체중계의 숫자가 줄어들자, 소비의 물결은 패션 산업으로 흘러들었습니다. 2026년 현재, 국내 주요 패션 브랜드의 매출 지표는 더 이상 계절이 아닌 '사이즈'에 의해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S-사이즈 붐'이 유통업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과거 '기름진 저녁'과 '고도수의 술'에 할당되었던 가계의 가처분 소득은 이제 자신의 달라진 실루엣을 증명할 고가의 의류와 애슬레저(Athleisure) 장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국내 1위 애슬레저 브랜드인 안다르와 젝시믹스의 실적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안다르의 2025년 매출이 전년 대비 25% 이상 성장하며 3,000억 원 시대를 연 데 이어, 2026년 상반기에도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서초구의 한 백화점 매장에서 만난 김미진(38) 씨는 "예전에는 몸을 가리기 위해 오버사이즈 셔츠만 찾았지만, 약물 치료로 15kg을 감량한 뒤로는 몸매가 드러나는 레깅스와 크롭 탑을 종류별로 구매하고 있다"며, "식비로 나가던 월 80만 원의 지출이 이제는 고스란히 의류 쇼핑과 필라테스 강습비로 전환됐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진하는 강력한 바이오 규제 완화 기조와 맞물려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시장을 'GLP-1의 테스트베드'로 삼으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동향 보고서에서 외식업계의 침체와 패션·뷰티 업계의 호황을 '신체 자본화(Bodily Capitalization)'라는 키워드로 분석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시적인 쾌락보다는, 관리된 신체를 유지하고 전시하는 데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제 구조로의 이행입니다.

월구독 상품이 된 건강과 신체 자본의 양극화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명암이 존재합니다. 비만 치료제가 '구독형 건강 서비스'로 자리 잡으면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의 '바이오 디바이드(Bio-Divide)'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IT 기업에서 근무하는 김민수 씨에게 비만 치료제는 선택적 의료가 아니라, 고정적인 도시가스 요금이나 전기세와 같은 '생존형 유틸리티'입니다. 그는 매달 급여가 들어오면 약 50만 원의 치료제 할부금과 전용 식단 관리 서비스 비용을 가장 먼저 떼어 놓습니다. 반면, 도봉구의 한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진호 씨에게 이러한 '화학적 날씬함'은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고물가와 금리 인상의 여파로 식비 지출의 절대액이 줄어든 그에게, 가장 효율적인 열량 공급원은 여전히 1+1 행사를 하는 컵라면과 가공식품이기 때문입니다.

소득 분위별 월평균 고액 비만 치료 및 웰니스 지출 (단위: 만 원, 출처: 2025 한국금융연구원)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2025 국민건강통계'는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합니다. 소득 상위 20%의 비만율은 전년 대비 4.2% 감소한 반면, 하위 20%의 비만율은 오히려 1.5% 증가했습니다. 경제적 격차가 '신체적 격차'로 고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골드만삭스 헬스케어 전략팀은 "2026년의 비만 치료제 열풍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신체의 계급화를 가속화하는 사회적 분기점"이라고 경고합니다. 자본이 신체의 형태를 결정하고, 그 신체가 다시 사회적 지위와 경쟁력을 강화하는 선순환과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된 셈입니다.

욕망의 GDP 재편: 쾌락에서 관리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먹는 즐거움'이 소비의 미덕이었던 시대를 지나, 냉철한 '생물학적 관리'의 경제학이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의 변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GDP를 구성하는 욕망의 성분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기업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합니다. '양(Volume)'을 팔던 시대에서 '기능(Function)'을 파는 시대로의 피벗(Pivot)입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약물로 인해 줄어든 식사량을 영양학적으로 보완하고, 근손실을 방지하며,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게 돕는 '동반자적 상품'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소비자는 더 이상 본능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약물을 통해 본능을 통제하고 지갑을 통해 자신의 몸을 설계하는 능동적인 투자자로 변모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질문해야 합니다. 효율성과 자본으로 재편된 이 '슬리밍 이코노미'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미학은 무엇이며,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가. 2026년의 한국 경제는 그 해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