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방 채권’ 소환: 서구의 재정적 막다른 골목과 K-방산의 전략적 가교

1939년의 망령: ‘전쟁 채권(War Bonds)’은 왜 테이블 위로 돌아왔나
2026년 1월, 런던의 금융 심장부 '더 시티(The City)'의 마천루 사이로 난데없이 1939년의 유령이 소환되었습니다. 영국 자유민주당의 에드 데이비(Ed Davey) 당수가 국방 예산 확충을 위해 제안한 '국방 채권(Defense Bonds)'—사실상의 '전쟁 채권'—발행론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호소력을 빌려오려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더 이상 세금만으로는 안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서구 경제의 비명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제안이 나온 배경, 즉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의 공식적인 사망 선고입니다. 지난 30년간 서구 정부들은 국방비를 깎아 복지를 늘리는 달콤한 방정식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운이 걷히지 않는 지금, 영국 재무부(HM Treasury)의 금고는 텅 비어 있습니다. 영국의 공공부채가 GDP의 100%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런던 정경대학(LSE)의 한 경제사학자는 이를 두고 "총을 사야 하는데 지갑은 비었고, 국민들에게 복지를 줄이자니 폭동이 두려운 딜레마"라고 묘사했습니다. 결국 남은 카드는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현재의 현금을 당겨쓰는 '채권'뿐인 셈입니다.
이러한 재정적 결단은 단순히 수치상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무기 체계의 '인도 속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서구권이 빚을 내서 만든 거대한 유동성이 과연 어디로 흐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명확합니다.
유럽의 딜레마: 부채의 시대, 총과 버터 사이에서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현재의 안보 위기는 단순한 군사적 위협을 넘어선 '재정적 막다른 골목'입니다. 런던과 베를린의 정책 입안자들은 교과서적인 경제 해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금을 올리자니 정권 교체 위기가 닥치고, 복지 예산을 줄이자니 파리 거리의 화염병 시위가 재연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4년 프랑스 연금 개혁 당시 마크롱 정부가 겪었던 극심한 사회적 갈등은 유럽 전역의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의 분석에 따르면, 서유럽 유권자의 60% 이상이 국방비 증액에는 찬성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의 연금이나 의료 혜택이 축소되는 것에는 결사반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미래의 세금'인 국채 발행뿐입니다. 골드만삭스의 2025년 유럽 경제 전망 보고서는 이를 두고 "재정 준칙(Fiscal Rules)을 우회하기 위한 정치적 명분 쌓기"라고 지적합니다. 일반적인 적자 국채는 비판받지만, '자유 수호'를 위한 국채는 의회 통과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투자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그널을 보냅니다. 유럽의 국방비 지출이 경기의 등락과 무관하게, '채권 시장이 허용하는 한' 지속될 구조적 상수(constant)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조달된 자금의 집행 속도입니다. 독일 킬 세계경제연구소(IfW)의 데이터에 따르면, 유럽 주요 방산 기업의 주력 전차 신규 주문 시 인도까지 평균 3~5년이 소요됩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18개월 이내에 초도 물량을 인도할 수 있는 '즉시 전력화'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유럽의 국방 장관들에게 선택지는 명확합니다. 3년 뒤에나 받을 수 있는 자국산 탱크를 기다리며 이자만 내느니, 지금 당장 항구에 도착할 수 있는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여 유권자들에게 '안보 강화'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채권: 청사진 혹은 경고?
우크라이나의 전쟁 채권(War Bonds) 사례는 '애국 금융'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유럽 국가들에게 중요한 학습 효과를 남겼습니다. 2022년 침공 초기, '조국의 방패'라는 슬로건 아래 발행된 채권은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민간 및 외국인 투자자의 참여는 급감했습니다. 결국 그 빈자리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 메우는 '인플레이션 금융'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채권 매입 주체 변화 (2022-2025)
유럽 국가들은 이 사례를 통해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전쟁 중인 국가는 인플레이션을 감수해야 하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는 국가 신용도를 담보로 한 '국방 채권'을 통해 막대한 유동성을 즉각적인 억지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과 발트 3국이 추진하는 모델은 바로 후자입니다. 돈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무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다는 교훈은, 다시 한번 한국의 제조 역량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국채(Bond)의 종착지: 왜 창원인가?
"돈은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Money hates waiting)." 런던 정경대(LSE)의 안보 경제 보고서가 지적했듯, 전시에 준하는 위기 상황에서 조달된 자금은 '미래의 개발'이 아닌 '즉각적인 전력(Off-the-shelf)'을 요구합니다. 영국 시민들이 구매한 국채는 10년 뒤에나 나올 차세대 전차가 아니라, 당장 내일 도버 해협을 지킬 수 있는 '현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폴란드 쇼크'를 통해 이를 증명했습니다. 2022년 계약 체결 후 불과 4개월 만에 초도 물량을 인도한 한국의 속도전은 서방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 특유의 제조 문화가 고도로 정밀한 방위 산업 역량과 결합하여, 서방이 잃어버린 '전시 양산 능력'을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클라크슨 리서치(Clarkson Research)의 데이터에 따르면, 이러한 '패스트트랙' 공급 계약은 통상적인 계약보다 마진율이 15~20% 더 높게 책정됩니다. 즉, 영국의 국채 자금이 급하게 풀릴수록 그 돈은 프리미엄이 붙은 채로 한국 기업의 재무제표에 꽂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방산주를 단순한 제조 업종이 아닌, 국제 정세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입는 '구조적 성장주'로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납기 속도 비교: 계약부터 초도 물량 인도까지 (단위: 개월)
투자자의 시선: 국가 리스크인가, 산업의 르네상스인가
바클레이즈(Barclays)의 2025년 4분기 거시경제 보고서가 경고했듯, 안보 지출 급증은 파운드화(GBP)의 구매력 하락을 예고합니다. 이는 영국 국채를 보유한 기관 투자자들에게는 불안 요소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이면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유럽의 재정 악화는 역설적으로 한국 방산 기업의 장기 호황을 보증하는 수표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전차 생산 라인이 인도까지 3년이 걸리는 병목 현상을 겪는 상황에서, 현대로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납기 준수 능력은 '안보 필수재'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갖습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파운드화의 변동성을 우려하기보다, 그 자금이 원화로 환전되어 들어오는 창원의 수주 잔고(Backlog) 증가세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럽 안보 예산 증가와 K-방산 수주액 상관관계 (2023-2026)
결론: ‘안보세’의 시대가 도래했다
영국 재무부가 만지작거리는 '국방 채권' 카드는 서구 경제가 재정 건전성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준전시 경제(Semi-war Economy)' 체제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1990년대 이후 누려왔던 '평화 배당금'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그 자리에 값비싼 '안보 청구서'가 날아든 것입니다.
이미 독일 키일 세계경제연구소(IfW Kiel)는 유럽의 방위산업 재건에 최소 10년이 걸릴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한국과 같은 비나토(Non-NATO) 동맹국의 제조업 역량에 의존하는 '가교 전략(Bridge Strategy)'이 필수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한국 방산주가 단순한 테마주가 아니라, 구조적 성장주임을 방증합니다.
영국은 시작일 뿐입니다. 재정 준칙에 묶여 있던 독일과 프랑스도 결국 영국의 모델을 벤치마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보라는 명분 앞에서는 어떤 재정 원칙도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2026년의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가 '안보세'를 납부하는 시대, 그 세금의 상당 부분은 이미 한국의 공장 지대로 흐를 준비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