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는 없다: 두테르테 ICC 재판과 2026년의 정의

헤이그의 법정, 침묵을 깨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회랑에는 팽팽한 실무적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2026년 1월, 재판소 예심재판부는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전 필리핀 대통령 측이 제출한 '고령 및 인지 능력 저하에 따른 재판 부적격성' 주장을 공식 기각했습니다. 이는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초법적 살인 혐의로 기소된 두테르테가 더 이상 건강이라는 방패 뒤로 숨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결정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회의론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국제 사법 체계가 독자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해석됩니다.
과거 "나를 감옥에 보낼 권한은 필리핀 법원에만 있다"며 ICC 조사관들의 입국을 조롱하던 두테르테의 호언장담은 이제 법리적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헤이그의 법정은 "피고인의 건강 상태가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국제법률가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 형사 사건에서 '건강 방패(Health Shield)'를 활용해 정의를 지연시키는 전략은 지난 10년간 40% 이상 증가했지만, ICC는 이번 판결을 통해 법적 책임의 예외 없는 적용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사법적 단호함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Marcos Jr.) 행정부에게는 고차방정식과 같은 외교적 난제를 던져줍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그간 두테르테 가문과의 정치적 동맹을 고려해 ICC와의 협력을 거부해 왔으나, 국내 여론의 변화와 국제 사회의 압박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가 다자간 인권 공조보다는 전략적 이익에 집중하면서, 필리핀 정부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국제 사법 기관의 독립적 판단이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의 최근 분석과 맥을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전문가는 "트럼프 2.0 시대의 고립주의는 역설적으로 ICC와 같은 기구들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전술적 자율성'을 제공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필리핀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의 독재적 리더십들에게 '국가 주권'이라는 이름의 면죄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장을 날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피로 물든 ‘마약과의 전쟁’, 그 잔혹한 기록
필리핀 마닐라 외곽의 좁은 골목길, 2016년부터 시작된 차가운 총성은 2026년 현재까지도 필리핀 민주주의의 거대한 흉터로 남아 있습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집권과 동시에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은 단순한 범죄 소탕 작전을 넘어, 국가 공권력이 법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시민의 생명권을 직접 집행한 초법적 처형(Extrajudicial Killings, EJK)의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두테르테는 “마약범 10만 명을 죽여 마닐라만의 물고기들이 살찌게 하겠다”는 극단적 수사로 대중의 공포와 지지를 동시에 결집시켰으며, 이는 곧 필리핀 전역을 피로 물들인 살육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 비극의 핵심에는 ‘오플란 토크항(Oplan Tokhang)’이라 불리는 작전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마약 용의자의 집을 방문해 자수를 권고한다는 이 명칭은 실상 살생부의 확인 절차에 가까웠습니다. 필리핀 인권단체 ‘카라파탄(Karapatan)’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의 대다수는 정식 재판은커녕 변호인의 조력조차 받지 못한 빈곤층이었습니다. 마닐라 카비테 지역에서 만난 한 유가족은 2019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경찰은 남편이 저항(Nanlaban)했다고 주장하며 총을 쐈지만, 우리는 그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목숨은 단지 실적을 위한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른바 ‘난라반’이라 불리는 경찰의 자구책 명분은 필리핀 전역에서 복사된 듯 반복되었고, 이는 국제사회가 이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통계의 격차는 이 전쟁의 잔혹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필리핀 경찰청(PNP)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망자 수와 인권단체 및 국제 조사기구가 추산하는 수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필리핀 '마약과의 전쟁' 희생자 추산치 비교 (출처: PNP vs Human Rights Watch 2024)
위 차트가 보여주는 수만 명의 간극은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죽음’들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방증합니다. 2026년 현재, 도널드 J. 트럼프 행정부의 재집권으로 미국이 국제 인권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실용주의적 고립주의를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ICC(국제형사재판소)가 두테르테의 건강 문제를 이유로 한 변론을 기각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강권 통치자가 주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국제법의 감시망을 영원히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무너진 ‘건강 방패’: 법리적 판단의 승리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변호인단이 최후의 보루로 내세웠던 '고령에 따른 인지 능력 저하'와 '심혈관 질환'이라는 방패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제1심판부의 견고한 법리적 장벽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졌습니다. ICC는 이번 결정에서 질병이나 노령이 반인도적 범죄 혐의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2026년 현재,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립주의 기조 속에서도 국제 사법 기구가 여전히 보편적 정의를 수호하는 기능을 유지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습니다.
ICC가 두테르테의 건강 방패를 기각한 핵심 논거는 '재판 가능성(Fitness to stand trial)'의 엄격한 적용에 있습니다. 2026년 1월 발표된 ICC 법무국 보고서에 따르면, 피고인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변호인의 도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인지 능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단순히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법 절차를 중단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과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 독재자들이 재판 지연 전술로 건강 문제를 악용했던 전례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법리적 승리는 아시아 지역의 '스트롱맨' 정치인들에게 서늘한 경고를 보냅니다. 특히 필리핀 내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에 복잡한 외교적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가문 간의 정치적 결속과 국제법 준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마닐라의 정치분석가 안토니오 라모스는 "두테르테의 건강 방패가 뚫린 것은 필리핀 내의 '면책 특권' 문화에 종언을 고하는 신호"라고 분석하며, 이것이 필리핀 내 법치주의의 향방을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르코스 Jr.의 딜레마: 혈맹과 정의 사이
마닐라의 말라카냥 궁전 주변에는 2022년 대선 당시 필리핀 전역을 뒤덮었던 '유니팀(UniTeam)'의 환호 대신 서늘한 정적과 보이지 않는 균열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Marcos Jr.) 대통령은 현재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전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유산과 국제형사재판소(ICC)라는 글로벌 사법 정의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ICC가 최근 두테르테 측이 내세운 '건강상의 이유'에 의한 수사 유예 신청을 단호히 기각한 것은, 마르코스 행정부가 더 이상 '국내 사법권 우선주의'라는 방패 뒤에 숨기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필리핀 정치 분석가들은 이를 '혈맹의 유효기간 만료'라고 평가합니다. 2024년 말부터 본격화된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의 갈등은 이제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존립의 문제로 번졌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경제 재건과 외자 유치를 위해 서구권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인권 문제와 ICC 협조라는 청구서를 동반합니다. 반면, 여전히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진 사라 두테르테(Sara Duterte) 부통령과 그 배후의 '다바오 세력'을 완전히 척지는 것은 국내 정치적 자살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필리핀 유니팀(마르코스-두테르테 연합) 지지율 추이 (Source: Pulse Asia/SWS)
트럼프 2.0 시대의 역설: 고립주의 속의 국제법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거리에서 불어오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바람은 2026년, 그 어느 때보다 거셉니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다자간 협약보다는 양자 간의 실리적 거래를 우선시하며, 국제기구의 구속력을 '주권 침해'로 규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을 일축하고 수사를 강행하기로 한 결정은 단순한 사법 절차를 넘어선 거대한 지정학적 역설을 드러냅니다.
마르코스 주니어 현 필리핀 대통령에게 이 상황은 고차방정식과도 같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취임 이후 미국과의 방위 협력을 강화하며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동참해 왔습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2025년 보고서가 지적했듯, 마르코스 행정부는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줄타기 외교를 구사해 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국의 미묘한 태도입니다. 과거 트럼프 1기 행정부가 ICC 관계자들을 제재하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계산된 무관심(Calculated Neglect)'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 국무부는 "필리핀의 사법 주권 문제"라며 공식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있는데, 이는 인권보다 전략적 파트너십을 중시하는 실리주의적 접근이면서 동시에, 동맹국 지도자의 '과거 청산' 문제에 굳이 휘말려 들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전술적 방관'은 오히려 ICC가 미국의 견제 없이 수사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세안 주요국 ICC 로마규정 비준 현황 및 미국 원조 규모 (2025)
심판의 시간, 그리고 아세안의 긴장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을 일축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단호한 태도는 단순히 한 전직 지도자에 대한 심판을 넘어, 2026년 현재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강권 통치(Strongman Politics)'의 효용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는 이제 자국 내 정치적 지지 기반인 두테르테 가문과의 결별과 국제 사회의 법적 의무 이행이라는 외통수에 몰려 있습니다.
실제로 ICC의 수사가 본격화됨에 따라 필리핀 정부가 마주할 물류적, 행정적 도전은 필리핀의 국가 시스템 자체를 시험대에 올릴 전망입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증인들의 신변 보호와 방대한 사건 기록의 디지털 증거 보존은 기술적 난제일 뿐만 아니라, 군경 내부에 잔존한 친(親) 두테르테 세력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는 정치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ISEAS-유소프 이삭 연구소(ISEAS-Yusof Ishak Institute)의 2026년 동향 보고서는 "아세안의 시민사회가 더 이상 자국 법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ICC와 같은 국제 사법 체계를 실질적인 '최후의 보루'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며, 이번 사건이 아세안 고유의 '상호 불간섭 원칙'에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결국 두테르테에 대한 ICC의 단호한 집행 의지는 2020년대 중반을 관통하는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보편적 정의'라는 가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가 선택할 협력의 수위는 필리핀의 외교적 위상은 물론, 아시아 전체의 인권 표준을 재설정하는 결정적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