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의 균열: 번햄의 '철의 실용주의'와 50인의 반란

새벽의 서신: 웨스트민스터를 흔든 50인의 서명
2026년 1월 27일 새벽 4시, 런던의 템즈강 변은 여느 때보다 짙고 차가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가 아침을 깨우기도 전, 영국 노동당(Labour Party) 내 강성 진보파 의원인 '사회주의 캠페인 그룹(Socialist Campaign Group)' 소속 50명의 서명이 담긴 공개 서한이 '가디언(The Guardian)'의 헤드라인을 기습적으로 장식했다. "원칙 없는 생존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같다(Survival without principles is a slow death)"는 문장으로 시작된 이 '새벽의 서신'은, 앤디 번햄(Andy Burnham) 총리가 지난주 다보스 포럼에서 예고한 '신(新) 산업 현실주의(New Industrial Realism)' 노선에 대한 사실상의 '정치적 탄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태의 발단이 된 '번햄의 결단'은 2026년 현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주도하는 공격적인 보호무역주의와 탈규제 기조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지난해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다우닝가 10번지의 주인이 된 번햄 총리는, 2030년으로 예정되었던 '넷 제로(Net Zero)' 전력망 달성 목표를 2035년으로 5년 유예하고, 북해 유전의 신규 시추 허가권을 한시적으로 재승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낮은 에너지 비용을 앞세운 제조업 공세에 맞서 영국 산업계의 가격 경쟁력을 방어하겠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계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두고 "이상(Ideal)이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순간"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노동당 내 '50인의 반란군'에게 이 결정은 단순한 정책 수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노동당의 영혼을 파는 행위이자, 기후 위기 세대와의 약속을 파기하는 '배신'이었다. 서한을 주도한 자라 술타나(Zarah Sultana) 의원은 BBC 라디오 4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트럼프의 그림자를 피하려다 그 그림자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며 격앙된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단순히 환경 정책을 둘러싼 이견을 넘어, 지난 수년간 서구 정치를 지탱해 온 '빅 텐트(Big Tent·포괄 정당)' 전략—다양한 이념을 하나의 우산 아래 묶어두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분열은 4월 조기 총선설이 파다하게 돌고 있는 한국 여의도 정치권에도 서늘한 경고를 보낸다. 지지층 확장을 위해 핵심 가치를 모호하게 만드는 '중도 통합' 전략이,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런던의 새벽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양당이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봉합하지 못한 채 외부의 적(경제 위기, 지정학적 불안)에만 집중할 때, 그 틈새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치명적인 균열로 터져 나올 수 있다. 번햄 총리는 '국익'을 선택했다고 믿었으나, 그 선택은 그를 지탱하던 당내 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번햄의 변신: '북부의 왕'에서 '철의 실용주의자'로
앤디 번햄(Andy Burnham)은 오랫동안 영국 노동당 좌파의 심장을 뛰게 하는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었다. 맨체스터 시장 시절 런던 중심의 엘리트 정치에 맞서 지방 분권과 공공 서비스 확대를 외치던 그가, 집권 후 돌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무상 교통 복지 공약을 축소하고 기업 친화적인 규제 완화책을 내놓은 것은 단순한 변심이 아니다. 이는 2026년이라는 잔혹한 시대가 서구 좌파 정치인들에게 강요한 '생존을 위한 전향서'에 가깝다.
우리는 먼저 번햄을 벼랑 끝으로 몬 거시경제적 배경을 직시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 2기, '미국 우선주의'는 더 이상 구호가 아닌 무차별적인 관세 장벽으로 실현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영국 재무부(HM Treasury)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10% 보편 관세 도입 이후 영국 제조업 수출은 타격을 입으며 3분기 연속 둔화세를 보였다. 맨체스터의 쇠락한 공장 지대를 첨단 바이오 클러스터로 부활시키려던 번햄의 '그레이터 맨체스터 전략(Greater Manchester Strategy)' 또한 미국 자본의 이탈과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돈이 없으면 정의도 없다." 번햄의 측근이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 말은 현재 영국 노동당이 처한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거 고성장 시대의 노동당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는 '빅 텐트(Big Tent)' 전략이 가능했다. 성장이라는 파이가 커지는 동안에는 급진 좌파의 분배 요구와 중도파의 성장론이 타협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의 영국은 '제로섬 게임'의 전장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무너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지탱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 산업을 위한 인프라에 투자할 것인가. 번햄은 후자를 선택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당내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조와 좌파 의원들의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번햄의 변신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서늘한 기시감을 준다. 이념적 선명성을 지키는 것과 현실적인 통치 능력을 입증하는 것 사이의 줄타기는 만국 공통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번햄을 '배신자'라 부르지만,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투자자들은 그를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노동당 정치인'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노선 투쟁이 아니다. 이념이 밥을 먹여주지 못하는 시대, 유권자들은 '착한 정치'보다 '유능한 나쁜 정치'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냉혹한 경고다. 번햄은 지금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북부의 왕'이라는 로맨틱한 칭호를 버리고 '철의 실용주의자'라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좌파의 역습: '영혼을 판 대가'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의원회관, 포트컬리스 하우스(Portcullis House)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앤디 번햄 총리가 '신(新) 경제 현실주의'를 표방하며 발표한 긴축 재정안과 노동 규제 완화책은, 당내 좌파 진영에게는 단순한 정책 변경이 아닌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50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서명한 공개 서한은 "우리는 보수당의 2중대가 되기 위해 집권한 것이 아니다"라는 격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예산의 숫자가 아니다. 번햄 총리가 트럼프 2.0 시대의 보호무역주의 파고를 넘기 위해 선택한 '친기업적 우클릭'이, 노동당의 120년 헌법적 가치인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근본적으로 훼손했다는 배신감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가디언(The Guardian)의 2026년 1월 분석에 따르면, 이번 반란에 가담한 의원들의 지역구는 대부분 과거 '레드 월(Red Wall)'이라 불리던 북부 산업 지대로, 경제적 박탈감이 극에 달한 곳들이다. 이 지역구 의원인 자라 술타나는 "번햄은 중도층을 잡기 위해 집토끼를 사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의 발언은 한국 정치권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외연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선명성을 희석하다가, 결국 핵심 지지층의 이탈을 초래하는 '중도화의 역설'이다. 번햄 정부는 기업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해고 요건을 완화했지만, 이는 곧바로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다. 정책적 유연성이 원칙 없는 야합으로 비치는 순간, '빅 텐트(Big Tent)'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데이터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영국 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가 노동당 당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진보'라고 규정한 당원들의 번햄 정부 지지율은 정책 발표 전 68%에서 발표 직후 32%로 반토막이 났다. 반면, 중도 성향 당원들의 지지율은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영혼을 판 대가'가 정치적 실리로 돌아오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026년 1월 노동당 내 이념 성향별 정부 지지율 변화 (출처: YouGov)
침묵하는 보수당, 웃고 있는 개혁당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의 복도에서 노동당 의원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동안, 반대편 벤치의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은 기이할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패배자의 무기력이 아닌, 사냥꾼의 인내심이다. 영국 정치 컨설팅 기업인 '포틀랜드 커뮤니케이션'의 2026년 1월 분석 보고서가 지적했듯, 집권 여당의 이념적 분열은 야당에게 있어 수천만 파운드의 선거 자금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앤디 번햄 총리가 당내 좌파와 중도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이,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은 물론이고 '레드 월(Red Wall)'의 유권자들마저 조용히 등을 돌리고 있다.
이 틈을 파고드는 것은 기존의 보수당만이 아니다. 더 우려스러운 징후는 바로 '개혁당(Reform UK)'의 약진이다. 2024년 총선에서 존재감을 알렸던 그들은, 2026년 현재 노동당의 정체성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들은 노동당 내 '50인의 반란'이 개혁당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민 문제와 생활비 위기(Cost of Living Crisis) 속에서, 번햄 정부가 '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색채를 잃어가는 동안, 개혁당은 선명한 메시지로 유권자들의 불안 심리를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개혁당이 스스로를 '진정한 노동 계급의 대변자'로 포지셔닝하며 노동당의 텃밭을 잠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데이터는 이러한 지각 변동을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유거브(YouGo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당의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 지난 3주 동안 개혁당의 지지율은 4.5% 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오차 범위를 넘어서는 유의미한 수치이며, 특히 잉글랜드 북부의 산업 쇠퇴 지역에서 그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이는 한국의 여의도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지율 방어를 위해 핵심 가치를 모호하게 만드는 '물 타기' 전략이, 오히려 집토끼를 쫓아내고 산토끼도 잡지 못하는 최악의 수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한국 정치의 거울: '빅 텐트'의 붕괴는 남의 일이 아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을 뒤흔든 노동당 내 50인 의원의 반란은 단순한 영국의 내부 사정이 아니다. 런던의 차가운 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현재, 혹은 머지않은 미래를 비추는 섬뜩한 거울이다. 앤디 번햄 총리가 '통치 가능성(Governability)'이라는 명분 하에 당의 오랜 강령을 수정하려다 맞이한 이 파국은, 정체성을 희생한 '빅 텐트' 전략이 2026년의 정치 지형에서 더 이상 유효한 생존 방식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거대 양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거 승리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원팀(One Team)'을 외치며 이질적인 세력을 무리하게 봉합해온 한국의 정당 정치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 영국 노동당의 분열이 보여주듯, 핵심 가치(Core Values)가 거세된 연대는 외부의 충격이 아닌 내부의 공허함으로 인해 무너진다. 지지층의 열망을 '현실 정치'라는 논리로 묵살하거나, 반대로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에만 매몰되어 중도층의 우려를 외면하는 양극단의 줄타기는 결국 당을 지탱하는 기둥 자체를 부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포괄 정당'의 시대가 저물고 '가치 정당'의 시대가 도래하는 과도기를 목격하고 있다. 번햄의 위기는 "무조건 뭉치면 산다"는 낡은 셈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경고한다. 여의도의 정치 지도자들은 런던발 비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집권을 위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유연함은 미덕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 자체를 상실한다면 그 빅 텐트는 비바람을 막아줄 피난처가 아니라, 모두를 질식시키는 거대한 무덤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통합은 다름을 억지로 섞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치열한 합의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