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의 승부수: '학자'와 '해결사', 위기의 상아탑을 나누어 짊어지다

맨해튼의 두 주인: 이상과 현실의 동거
2026년 1월, 맨해튼 모닝사이드 하이츠의 아침 공기는 차갑다. 하지만 컬럼비아 대학 본관인 로우 메모리얼 도서관(Low Memorial Library)을 감도는 한기는 단순한 계절 탓이 아니다. 총장실의 육중한 문 뒤에서는 미국 아이비리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실험이 '뉴 노멀(New Normal)'로 굳어지고 있다. 바로 '학문적 양심'을 수호하는 전통적 총장(President)과, 워싱턴과 월가를 오가며 생존을 흥정하는 이사회 의장(Board Chair) 중심의 '경영형 리더십'이 공존하는 체제다.
이 이원화된 구조는 2024년 말, 카트리나 암스트롱 총장 대행 체제와 데이비드 그린월드 이사회 의장의 '학자와 해결사(The Academic and The Dealmaker)' 파트너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캠퍼스 시위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여겨졌으나,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는 트럼프 2.0 행정부의 압박에 맞서는 아이비리그의 표준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백악관이 대학의 면세 혜택과 연방 지원금을 무기로 '진보적 아카데미아'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순수 학문의 권위만으로는 학교를 지탱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이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총장'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상아탑의 꼭대기에서 지성을 논하는 철학자라면, 현재 컬럼비아의 실질적인 권력 구도는 야전사령관을 필요로 한다. 익명을 요구한 대학 관계자에 따르면, 학문 총장이 인문학부 예산 삭감을 막기 위해 교수진과 씨름하는 동안, 이사회의 '전략 그룹'은 워싱턴 D.C.행 아셀라 익스프레스(Acela Express)에 몸을 싣는다. 그들의 가방 속에는 교육부의 규제 완화 요구사항에 맞춘 커리큘럼 개편안과, 공화당 강성 의원들을 달래기 위한 '캠퍼스 중립성 강화' 보고서가 들어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두고 2010년대 공립대학들을 휩쓸었던 소위 '위스콘신 모델(Wisconsin Model)'의 사립대 버전이라고 분석한다. 과거 스콧 워커 주지사 시절 위스콘신 대학이 예산 삭감에 맞서 기업형 이사회 구조를 도입했던 생존 전략이, 이제는 자본과 권력의 압박 앞에 놓인 아이비리그의 현실이 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으로 유학생 등록금 수입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이 전략적 타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지 모른다.
트럼프 2.0 시대, 상아탑에 청구된 계산서
캠퍼스의 정적은 평화가 아닌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출범 2년 차를 맞아 '워싱턴의 청구서'를 대학들에게 들이밀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더 이상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후원자가 아니다. "납세자의 돈이 급진좌파 이념의 인큐베이터에 쓰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조 아래, 연방 연구 자금 지원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컬럼비아 대학이 사실상 공식화한 '이원화 리더십'은 이러한 시대적 압박에 대한 고육지책이다. 과거 총장이 학문적 권위와 행정적 책임을 모두 짊어졌다면, 이제는 역할이 분리되었다. 총장은 학문적 수월성과 내부 결속을 다지는 '치유자' 역할을, 이사회와 경영진은 정치적 리스크를 관리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사업가' 역할을 맡는다. 이는 대학이 스스로를 '순수 학문 공동체'가 아닌, 정치적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거대 복합 기업'으로 재정의했음을 시사한다.
컬럼비아 의과대학에서 면역학을 연구하는 (가명) 정민우 박사는 최근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NIH(국립보건원) 그랜트가 끊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연구 주제 선정 단계부터 '정치적 검열'을 하게 됩니다. 과학적 호기심보다 '이 주제가 공화당 의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학의 재정 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타협의 불가피성이 드러난다. 통상적으로 대학 재정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의료 서비스 수익을 제외하면, 연구 중심 대학의 핵심 동력은 여전히 연방 정부의 지원과 기부금이다.
2026 컬럼비아 대학 추정 운영 예산 구조 (단위: %)
위 데이터에서 14%를 차지하는 정부 지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기초 과학과 첨단 기술 연구의 생명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반유대주의 청문회 이후 가속화된 대학 기부금에 대한 과세 논의와 지원금 삭감 카드는, 대학 이사회가 '학자' 출신 총장 뒤에 숨어있던 '해결사'들을 전면으로 내세우도록 강제했다.
결국 컬럼비아의 선택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다. 21세기 대학이 국가 권력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조건부 생존'을 선택했다는 현실적인 항복 선언일지도 모른다.
'위스콘신 아이디어'의 변질: 실용주의라는 칼날
20세기 초, "대학의 경계는 주(State)의 경계와 같다"던 '위스콘신 아이디어(Wisconsin Idea)'는 대학의 공공성을 상징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이 철학은 기묘하게 변주되고 있다. 대학의 경계는 이제 '시장(Market)'의 경계와 일치하며, 공공의 이익은 철저한 '투자 대비 수익(ROI)'으로 재정의된다.
컬럼비아 대학은 최근 '미래 전략'이라는 명분 아래 기초 학문 분야에 대한 지원을 재검토하고, 그 자원을 인공지능(AI), 바이오테크, 국방 기술 관련 연구소로 집중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학과 개편을 넘어, 대학 운영의 OS(운영체제)가 '진리 탐구'에서 '수익 창출'로 교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2024년 분석에 따르면, 이미 당시부터 이사회 내 기업인 출신들의 입김이 강해지기 시작했으며, 2026년 현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비교 문학을 전공한 시간 강사 (가명) 사라 밀러 박사의 사례는 이러한 '실용주의'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베어내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과거에는 학문의 깊이가 평가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강의의 '취업 시장 친화성'이나 기업 스폰서십 유치 가능성이 생존 척도가 되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미 교육부 자료와 대학 공시를 종합해 보면, 주요 사립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예산은 정체되거나 감소한 반면, AI 및 양자 컴퓨팅 관련 예산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미국 주요 사립대 분야별 예산 증감 추이 (2023-2026, 추정)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대학을 거대 기업의 R&D 하청 기지로 전락시킬 위험이다. 경영 효율성을 앞세운 이사회는 '돈이 되지 않는' 비판적 사고나 역사적 통찰을 가르치는 학과들을 구조조정의 1순위로 삼는다. 총장이 대외적인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동안, 실권을 쥔 경영진은 냉혹한 회계 장부를 들이대며 학과 통폐합을 지휘하는 구조.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상아탑의 진화인가, 붕괴인가.
서울의 대학들이 컬럼비아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
컬럼비아 대학의 '이원화된 리더십'은 태평양 건너 서울의 대학가에도 서늘한 예고편이다. 한국의 대학들이 마주한 현실은 미국의 '정치적 압박'보다 더 근본적인 '인구 절벽'이라는 생존 위기다. 하지만 그 해법이 '총장의 CEO화'로 수렴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자조는 옛말이 되었다. 수도권 대학마저 재정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서울 소재 사립대학 기획처장 (가명) 박지훈 씨의 고민은 컬럼비아 이사회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지금 이사회에서 원하는 총장은 덕망 있는 학자가 아니라, 정부의 라이즈(RISE) 사업이나 글로컬 대학 선정에 사활을 걸고 뛸 수 있는 '세일즈맨'입니다."
미국 사립대들은 그나마 막대한 기부금(Endowment)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지만, 한국 사립대는 등록금 의존율이 기형적으로 높고 정부 지원 사업에 목을 매야 한다. 만약 컬럼비아 식의 '경영 중심 리더십'이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도입된다면, 학문적 자율성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돈이 되는 학문"만이 살아남는 생태계가 가속화될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이 보여준 '전략적 타협'은 어쩌면 한국 대학들이 겉으로는 거부하고 싶지만, 속으로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불편한 미래일지 모릅니다. 서울의 대학들이 2026년 뉴욕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그곳의 풍경이 머지않아 서울의 캠퍼스에서 재현될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의 청사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