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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파운드의 덫': 이지젯 사태와 드립 프라이싱의 종말

AI News Team
'5.99파운드의 덫': 이지젯 사태와 드립 프라이싱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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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파운드에 숨겨진 진실: 함정이 된 기내 가방

2026년 1월, 런던발 니스행 항공권을 검색하던 직장인 이준호(34, 가명) 씨는 '기내 수하물 5.99파운드(약 1만 원)부터'라는 문구에 시선을 뺏겼다. 항공권 자체도 35파운드(약 6만 원) 수준으로 합리적이라 판단한 그는 망설임 없이 예약을 진행했다. 그러나 결제 직전 마주한 실제 '기내 수하물(Large Cabin Bag)' 요금은 광고와는 딴판이었다. 그가 선택한 항공편의 수하물 비용은 최저가의 3배가 넘는 21파운드로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이미 여정 선택과 개인정보 입력을 모두 마친 상태라 되돌아가기 어려웠다"며, "결국 '5.99파운드'는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라고 토로했다.

영국의 유력 소비자 단체 '위치(Which?)'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는 이 씨와 같은 소비자들이 겪는 혼란이 단순한 오해가 아님을 입증한다. 조사 결과, 이지젯이 홍보하는 최저 수하물 요금을 실제로 적용받을 수 있는 항공편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승객은 '수요 기반 동적 가격 책정(Dynamic Pricing)'이라는 명목하에 예고된 최저가보다 훨씬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는 표면적인 진입 가격을 낮게 유지해 소비자를 유인한 뒤, 결제 과정에서 필수적인 옵션 비용을 순차적으로 부과하여 최종 가격을 부풀리는 전형적인 '드립 프라이싱(Drip Pricing)'의 진화된 형태다.

'드립 프라이싱', 알고리즘이 설계한 소비의 늪

문제의 핵심은 '선택권'으로 위장된 '강제성'에 있다. 현재 이지젯은 기본 운임에 좌석 밑에 들어가는 작은 가방 하나만을 무료로 허용한다. 기내 선반(Overhead Locker)을 이용해 일반적인 기내용 캐리어를 싣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가 요금을 내거나, 더 비싼 좌석 등급을 구매해야 한다. '위치'의 분석에 따르면, 표준 좌석을 선택한 승객이 기내용 캐리어를 반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추가 비용은 평균적으로 항공 운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빈번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의 악용으로 설명한다. 소비자는 처음에 제시된 '저렴한 항공권과 최저 수하물 요금'에 닻(Anchor)을 내리고, 이후 추가되는 비용들을 '티켓을 놓치지 않기 위한 합리적 지출'로 합리화하게 된다. 이미 예매 과정에 투입한 시간과 노력, 즉 매몰 비용(Sunk Cost) 때문에 결제를 중단하고 다른 항공사를 찾기도 쉽지 않다. 항공사 입장에서 승객은 목적지로 이동하는 고객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지갑을 여는 데이터 포인트가 된 셈이다.

유럽의 규제 칼날: "투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은 영국의 '디지털 시장, 경쟁 및 소비자 법(DMCC)'이다. 2024년 제정되어 유예 기간을 거쳐 2026년 1월부로 전면 시행된 이 법안은 유럽 항공 업계에 강력한 '가격 투명성'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핵심은 간단하다. 소비자가 결제 마지막 단계에서 마주할 최종 가격 범위를 최초 검색 단계부터 명확히 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기업 전 세계 매출의 최대 10%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실제로 런던 히드로와 개트윅 공항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최근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과거에는 최저가만 강조되던 검색 결과 화면에 이제는 '수하물 포함 예상 총액'이 병기되는 빈도가 늘고 있다. 이지젯과 라이언에어(Ryanair) 등 초저가 전략을 내세웠던 기업들에게 DMCC의 본격 시행은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그동안 이들 기업의 수익 구조는 '최저가 미끼'로 트래픽을 유도한 뒤, 복잡한 부가 서비스(Ancillary Revenue)로 마진을 남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주요 LCC 부가 수익 비중 변화 (2022-2026)

위 차트에서 볼 수 있듯, 2024년 정점을 찍었던 저가 항공사들의 부가 수익 비중은 규제가 가시화된 2025년부터 꺾이기 시작해 2026년에는 30%대 중반으로 회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기업들에게는 단기적인 수익성 악화 요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 비용'을 지불하고 시장을 정상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남의 일이 아닌 한국: K-LCC의 수하물 정책 긴급 점검

이러한 흐름은 한국 항공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등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들 역시 수익성 개선을 위해 위탁 수하물 유료화, 사전 좌석 지정비 인상 등 글로벌 트렌드를 답습해왔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고환율 기조와 유가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LCC들은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가 수익 창출에 더욱 사활을 걸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특가 운임'의 투명성이다. 대다수 K-LCC의 이벤트성 특가 항공권은 무료 위탁 수하물을 '0kg'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기내 반입 수하물 무게 측정까지 강화하며 현장에서 추가 요금을 징수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소비자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5만 9000원짜리 특가 항공권이 위탁 수하물과 좌석 지정을 더해 14만 원이 되는 마법은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이 보여준 '징벌적 과징금'과 '입증 책임의 전환'은 향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아가야 할 가이드라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AI가 본 최적 가격: 심리전을 넘어선 투명성

결국 시장의 정상화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 원칙의 확인 과정이다. 숨겨진 비용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항공권 가격은 단기적으로 상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가격 인상이 아니라, 그동안 기업이 감추고 소비자가 모른 척했던 '비용의 현실화'다.

흥미로운 점은 2026년의 소비자들이 AI라는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개인화된 AI 에이전트는 항공사가 제시한 '미끼 가격'이 아닌, 사용자의 여행 패턴(수하물 유무, 좌석 선호 등)을 분석해 '최종 결제 예상 금액'을 기준으로 항공권을 필터링한다. AI는 '매진 임박'이라는 빨간 글씨에 조바심을 내지도, 단계별로 붙는 추가 요금에 무감각해지지도 않는다. 오직 데이터에 기반한 '총소유비용(TCO)'만을 냉정하게 계산할 뿐이다.

이지젯 사태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투명하고 정직한 15만 원짜리 항공권을 원하는가, 아니면 1만 원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14만 원의 추가 비용을 치르는 시스템을 원하는가? 기술이 주도하는 시장의 자정 작용 속에서, 투명성은 이제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탑승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