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인도 '슈퍼 무역 동맹': 한국 경제를 옥죄는 구조적 고립의 위기

브뤼셀과 뉴델리의 '새벽의 악수'와 닫히는 문
2026년 1월, 브뤼셀의 겨울바람은 유난히 매서웠지만 베를레몽(Berlaymont) 빌딩 13층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4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통상총국과 인도 상공부 대표단 사이에서 마침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통상적으로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리는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의 심화 버전인 '강화된 무역 및 기술 파트너십(ETTP)'의 세부 조율이 불과 11개월 만에 마무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이례적인 속도전의 배후에는 워싱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기 취임 직후 서명한 '상호무역법(Reciprocal Trade Act)'에 근거해, 대미 무역 흑자국에 대한 보편적 관세 부과를 예고하자, 다급해진 유럽과 인도가 서로의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인도 뉴델리의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센터(CPR)가 1월 발표한 보고서는 이번 합의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세 인하 협정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라시아 양단(兩端)의 전략적 방파제 구축이다." CPR의 분석처럼, 이번 합의의 핵심은 '공급망의 배타적 통합'에 있습니다. EU는 인도의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에 부응하여 첨단 제조 설비와 친환경 기술을 대거 이전하기로 약속했고, 그 대가로 인도는 EU 기업들에 대해 중국 기업을 배제한 우선적 시장 접근권을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이 '새벽의 악수'가 한국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엄중합니다. 독일의 정밀 기계와 프랑스의 항공우주 기술이 인도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그동안 인도 시장에서 '가성비'와 '신뢰'를 무기로 점유율을 높여온 한국 기업들의 파이를 직접적으로 위협합니다. 특히 브뤼셀 외교가에서는 EU가 자국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준을 인도 수출품에 한해 기술 지원을 전제로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엄격한 환경 규제를 준수하며 비용 압박을 견디고 있는 한국 철강·화학 기업들에게 불공정한 경쟁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포스트 차이나'의 완성: 제조와 소비의 화학적 결합
2026년 1월,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푸네(Pune) 외곽의 신규 산업단지. 이곳은 더 이상 먼지 날리는 공사판이 아닙니다. 독일의 정밀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프랑스의 에너지 관리 시스템이 전력을 통제하며, 인도의 젊은 엔지니어들이 이를 운용합니다. 이 장면은 EU와 인도의 결합이 단순한 관세 장벽의 철폐를 넘어, '제조(India)와 기술(EU)의 화학적 결합' 단계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워 동맹국에게조차 고율 관세의 칼날을 휘두르는 지금, 유럽은 거대한 내수 시장과 생산 기지가 절실했고, 인도는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를 완성할 첨단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이 이해관계의 일치는 중국을 배제한 '제3의 거대 공급망'을 탄생시켰습니다.
현장의 변화는 한국 기업들에게 뼈아픈 현실로 다가옵니다. 인도 현지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컨설팅 펌의 2026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파트너들은 초기 비용이 들더라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준을 충족하는 자국 장비 사용을 인도 합작사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도 공장들은 유럽 본토에 즉시 수출 가능한 수준의 친환경 인증 제품을 생산하게 됩니다. 유럽이 인도에 제공한 것은 단순한 자본이 아니라, 글로벌 무역 장벽을 넘을 수 있는 '표준(Standard)'과 '노하우'였기 때문입니다.
2026 인도 시장 내 주요 경쟁국 관세 경쟁력 비교 (추정치)
이러한 'EU-인도 밀월'은 한국의 대인도 수출 통계에서 경고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한국무역협회(KITA)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하반기부터 인도의 대EU 자본재 수입은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인 반면, 한국산 일반 기계와 중간재의 점유율은 정체되거나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인도가 필요로 하는 고부가가치 설비 수요를 독일과 프랑스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도가 단순 조립 기지에서 '자립형 제조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설비 공급자(Vendor)의 지위를 유럽 경쟁자들에게 내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소비 시장의 결합입니다. 14억 인구의 인도는 중국을 대체할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 EU-인도 간 무역 장벽이 낮아지면서, 유럽의 명품과 고급 소비재는 인도 중산층 시장을 공략하고, 인도의 섬유, 의약품, IT 서비스는 유럽 시장으로 흘러들어갑니다. 한국이 중간재 수출에 주력하는 사이, 유럽은 인도의 '소비 취향'과 '생산 표준'을 동시에 장악하며 시장의 규칙 자체를 새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 장벽의 철폐와 '표준'이라는 새로운 족쇄
관세가 사라진 자리에 더 높고 단단한 '보이지 않는 벽'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브뤼셀과 뉴델리가 손을 잡고 쌓아 올리는 이 벽은 물리적인 장벽이 아닙니다. 바로 '표준(Standard)'과 '데이터(Data)'라는 이름의 디지털 요새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관세 철폐 효과에 주목할 때, 통상 현장에서는 EU와 인도가 공유하기 시작한 기술 규범이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이중 규제'의 덫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유럽연합(EU)의 강력한 환경·디지털 규제인 이른바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가 인도 시장에 이식되는 과정은 한국 수출 기업들에게 큰 부담입니다. 트럼프 2.0 행정부가 탈규제 노선을 걷는 것과 대조적으로, EU는 인도를 자신들의 규제 생태계로 끌어들여 거대한 '규제 블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인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단순히 현지화하는 것을 넘어, 까다로운 EU의 표준까지 동시에 충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동차용 센서를 제조하여 인도 첸나이 공장으로 납품하는 A사의 사례는 이러한 구조적 위협을 시사합니다. A사 대표는 최근 인도 파트너사로부터 2026년 하반기부터 적용될 인도의 새로운 '디지털 부품 안전 인증'이 EU의 기준을 대폭 차용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는 기존 인도의 BIS 인증을 넘어선, 유럽 수준의 데이터 보안 프로토콜과 탄소 발자국 추적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미국 수출길이 좁아진 상황에서, 인도 시장마저 유럽 기업들에게 유리한 운동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양측의 합의문 세부 조항은 단순한 기술 협력을 넘어선 '배타적 표준 동맹'의 성격을 띱니다. 6G 통신 장비와 AI 안전성 평가 기준에서 EU와 인도는 '상호 운용성(Interoperability)'을 핵심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중국의 장비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기술 표준을 고집하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을 견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그동안 글로벌 표준(사실상 미국 표준)에 맞춰 기술을 개발해 왔기에, 인도가 EU 모델을 따르는 규제를 강화할 경우 기술 개발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2026 인도 시장 내 주요국 기업 규제 준수 비용 증가율 전망 (KIEP 모델 추정)
위 데이터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의 분석 모델을 기반으로 추정한 전망치입니다. EU 기업들은 상호 표준 인정(MRA)을 통해 규제 준수 비용을 최소화(5% 증가)하는 반면, 한국 기업들은 별도의 인증 절차와 데이터 인프라 구축으로 인해 비용이 30% 이상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가격 경쟁력이 핵심인 인도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유럽 제품에 밀려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낡은 CEPA라는 족쇄와 골든타임의 종료
창원 국가산업단지의 수출 현장에서는 2010년 발효된 한-인도 CEPA(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의 한계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인도 관세청의 엄격한 '원산지 결정 기준(PSR)'과 행정 절차는 한국 기업들에게 여전히 높은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최근 뭄바이 전시회 등에서 관측되는 독일 경쟁사들의 움직임은 곧 발효될 EU-인도 신규 협정의 '인증 수출자 자기증명' 제도 등을 활용해 통관 절차를 간소화할 준비를 마친 모습입니다. 한국이 2010년 선점했던 '퍼스트 무버'의 지위가 인도 시장에서 빠르게 퇴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한국무역협회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한-인도 CEPA의 수출 활용률은 여전히 50%대 초반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미, 한-EU FTA가 80~90%의 활용률을 기록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인도 정부가 '비크싯 바라트(Viksit Bharat, 선진 인도) 2047' 비전 하에 자국 제조업 보호를 강화하면서, CEPA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낡은 협정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사이, EU는 '디지털 통상', '탄소 국경세(CBAM) 상호 인정', '공급망 실사 면제'라는 현대적인 무기를 장착하고 인도 시장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코트라(KOTRA)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 역시 이러한 위기감을 뒷받침합니다. 보고서는 "인도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중국의 저가 공세와 유럽의 프리미엄 전략 사이에서 '넛크래커'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며, 단순 상품 수출을 넘어선 공급망 파트너십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도가 구축하려는 '포스트 차이나' 공급망의 표준이 유럽식으로 굳어질 경우, 한국 기업들은 인도 시장 진입을 위해 이중, 삼중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적 열위에 놓이게 됩니다.
결론: 판을 엎어야 산다
유럽연합(EU)과 인도의 밀착은 단순한 '관세 인하' 협상이 아니라,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우선주의의 파고를 넘기 위한 거대한 '공급망 설계도'입니다. 2026년 현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편적 관세 장벽이 현실화되면서, 이들의 결합은 한국에게 글로벌 가치사슬(GVC)에서의 '구조적 배제'라는 시나리오를 예고합니다.
이제 전략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한-인도 양자 관계'라는 좁은 시야를 버리고, '인도-태평양 전략'의 큰 틀 안에서 EU-인도 경제 회랑(IMEC)과 같은 다자간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정부는 단순히 기업의 애로사항을 전달하는 창구를 넘어, EU가 인도에 제안하는 인프라 및 기술 표준화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을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시키는 '한-EU-인도 삼각 협력' 모델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스마트 시티 구축 사업에 EU의 자본과 한국의 6G 통신 및 AI 관제 시스템을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위기의 본질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CEPA 개정의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도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등에 올라탈 때 어떤 안장을 얹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EU는 이미 자신들의 규범이라는 안장을 얹었습니다. 우리는 그 안장 위에 올라탈 기술적 파트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코끼리의 발에 채일 구경꾼으로 남을 것인가. 선택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