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이방인: 트럼프 2.0 시대, 안보 주권의 청구서

설원 위의 긴장: 총을 든 미국의 손님들
2026년 1월,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 아래 자리 잡은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 70년 만에 다시 올림픽의 성화가 타오르는 이곳의 설원은 겉보기에 평화로운 축제의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슬로프 주변과 선수촌 입구를 지키는 것은 이탈리아의 국가헌병대 카라비니에리(Carabinieri)만이 아닙니다. 짙은 네이비색 전술 재킷에 선명하게 박힌 'FEDERAL AGENT'라는 문구, 그리고 허리춤에 실탄이 장전된 글록 19 권총을 찬 미국 요원들이 그들 곁에, 때로는 그들보다 앞서 서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올림픽과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에서 미국 선수단의 경호는 국무부 산하 외교보안국(DSS)이 주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에서는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까지 대거 전진 배치되는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는 트럼프 2.0 행정부 출범 이후 강화된 '무관용 자국민 보호주의'가 투영된 결과로, 미국 시민이 존재하는 모든 곳을 사실상의 '잠재적 관할 구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과거 주최국 치안 당국의 뒤를 받치던 '로우 키(Low-key)' 전략은 폐기되었고, 대신 '가시적 억지력(Visible Deterrence)'이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코르티나 담페초 시내 중심가인 코르소 이탈리아(Corso Italia)에서 3대째 등산 장비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마르코 베르나르디(가명) 씨는 달라진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디 씨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무장 요원들이 이탈리아 경찰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며, "우리는 전 세계의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지금은 마치 점령군이 주둔한 군사 기지에서 장사를 하는 기분"이라고 토로했습니다. 베르나르디 씨는 과도한 검문검색으로 인해 매장 매출이 예년 겨울 성수기 대비 약 15% 감소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아직 지역 전체의 공식적인 관광 통계가 집계되지는 않았으나, 현지 상인 연합회 측에서도 "과도한 보안 조치가 관광객들의 심리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유력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는 최근 사설을 통해 "로마의 주권이 워싱턴의 안보 논리에 의해 유예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1998년 미군 전투기의 저공비행으로 발생한 체르미스 케이블카 절단 사고(Cermis disaster)의 트라우마가 여전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미 연방 요원들이 독자적인 지휘 체계하에 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은 단순한 보안 문제를 넘어 국민 정서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뢰의 붕괴: 동맹의 방패를 믿지 못하는 제국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이 일시적인 올림픽 경호 조치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국토안보부는 이번 올림픽을 '해외 자산 방호의 새로운 모델'을 테스트하는 시험대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테러 위협이 감지될 경우, 동맹국의 영토라 할지라도 현지 당국의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하고 미 요원들이 즉각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전 수칙(Rules of Engagement)을 적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밀라노 시내 한복판, 미국 선수단 숙소 주변은 사실상 '미국 영토'나 다름없습니다. 개최국의 치안 능력을 신뢰하지 못해 자국 요원을 대거 파견한 광경은 트럼프 2.0 행정부가 정의하는 '동맹'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익명을 요구한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연구원은 이를 두고 "동맹국의 치안 시스템을 '보완재'가 아닌 '잠재적 리스크 요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2025년 말, 유럽 내 테러 위협이 고조되었을 때 미 국무부는 이탈리아 정부의 대응 태세를 공개적으로 우려하며 마찰을 빚은 바 있습니다.
현장의 외교관들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밀라노 주재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이탈리아 경찰이 미국 요원의 검문을 통과해야만 미국 선수단 구역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주권 국가의 공권력이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무력화되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미국이 내세우는 명분은 '테러로부터의 원천 봉쇄'입니다. 솅겐 조약으로 국경이 옅어진 유럽의 보안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자국민 보호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 동맹국의 사법권도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위계적인 동맹관의 투영입니다.
치외법권의 그림자: 서울을 향한 묵직한 경고
이러한 '신뢰의 붕괴'는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태평양 건너 서울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단순한 비용 청구를 넘어, 주한미군 기지 밖 작전 반경에 대한 유연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최근 외교가에는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SMA)의 이면 합의 과정에서 미 측이 평택 캠프 험프리스를 넘어선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 시설에 대한 '유사시 직접 접근권'을 요구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외교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협의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고, 해당 기업들 역시 공식적인 논평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소문 자체가 트럼프 2.0 시대의 안보가 '영토 방어'에서 '자산 보호'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지적합니다. 국립외교원의 최근 보고서가 "트럼프 2.0 시대의 동맹은 가치 공유를 넘어선 '법적 종속'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에게 묵직한 과제를 던집니다. 단순히 방위비 분담금을 얼마나 더 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안보 논리가 우리의 사법 주권과 충돌할 때,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서 선을 그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급합니다. '혈맹'이라는 수사 뒤에 가려진, 냉혹한 '주권의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