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ALK.
Society

1조 원의 면죄부와 트럼프 2.0: 자본은 어떻게 진실을 거래하는가

AI News Team
1조 원의 면죄부와 트럼프 2.0: 자본은 어떻게 진실을 거래하는가
Aa

2023년 4월 18일,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 앞은 '세기의 재판'을 기다리는 전 세계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루퍼트 머독이 증언대에 서는 역사적인 장면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개정 직전 타전된 '합의' 소식은 안도감보다는 기묘한 허탈함을 남겼다. 폭스뉴스는 방송을 통해 사과문을 낭독하지 않았고, 단지 7억 8,750만 달러(한화 약 1조 1,000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영수증만을 남겼을 뿐이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를 두고 '진실의 승리'라 칭송했다. 허위 정보를 유포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준 판례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트럼프 2.0' 시대를 살아가는 2026년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본 그날의 합의는, 역설적으로 거짓말에 '정가표'를 붙여준 날로 기록된다. 진실이 자본으로 거래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가 오늘날 미디어 생태계를 어떻게 교란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비용'으로 전락한 저널리즘의 윤리

여의도 증권가에서 15년째 미국 미디어 섹터를 분석해 온 박지훈(가명) 연구원은 이 합의를 '냉철한 손익계산서의 승리'라고 정의한다. "당시 폭스 코퍼레이션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4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1조 원에 달하는 합의금은 일반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지만, 폭스 입장에서는 연간 매출의 일부를 떼어내 '법률 리스크'를 해소하고 경영 불확실성을 제거한, 지극히 합리적인 '비용 처리(Cost of doing business)'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분석대로, 합의 발표 직후 폭스의 주가는 오히려 불확실성 해소를 호재로 인식하며 소폭 상승 마감했다. 자본 시장은 거짓말의 윤리적 책임보다 경영상의 리스크 관리에 더 높은 점수를 준 셈이다.

실제로 폭스뉴스의 수익 구조를 뜯어보면 이 '비용'의 성격은 더욱 명확해진다. 케이블 수신료와 광고 수익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매출은 충성도 높은 시청자 층, 즉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력에 비례한다. 만약 폭스뉴스가 도미니언 소송 과정에서 '선거 사기 주장은 거짓이었다'라고 방송을 통해 시인하고 사과했다면, 그들의 핵심 자산인 시청자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탈했을 것이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시청률 하락으로 인한 장기적 매출 손실이 일회성 합의금 1조 원보다 훨씬 더 뼈아픈 타격이었을 것이다. 결국 1조 원은 진실을 덮고, 시청자의 환상을 유지해준 '값비싼 구독료'였던 셈이다.

폭스뉴스 합의금 vs 연간 매출 비교 (단위: 억 달러)

트럼프 2.0 시대, 리스크의 비용화

이러한 '비용의 논리'는 2026년 현재, 더욱 정교해진 '가짜 뉴스의 경제학'으로 진화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규제 완화 기조와 맞물려, 일부 강경 보수 매체와 유튜브 채널들은 소송 비용보다 지지층 결집을 통한 수익(구독료, 광고비)이 더 크다면 과감히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유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에서 미디어 정책을 분석하는 정민우(가명) 선임연구원은 이러한 현상을 "리스크의 비용화"라고 진단한다. "과거 언론사에게 오보나 조작에 대한 소송은 존폐를 가르는 위기였지만, 이제는 수익 모델 내에서 감당 가능한 '운영 비용(Operating Expense)'으로 계상되고 있습니다." 팩트 체크는 느리고 자극은 빠르다. 진실이 신발 끈을 묶는 사이, 거짓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미 계좌에 입금까지 마치는 형국이다.

특히 2025년 이후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규제 완화 흐름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했다. 특정 정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매체들의 수익률은 오히려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는 제동 장치가 사라진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미디어 권력이 이제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믿음'을 팔고 있음을 시사한다.

태평양을 건너온 경고: 한국의 '사이버 렉카'

미국의 폭스뉴스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에 지불한 7억 8,750만 달러가 '거짓말의 대가'로 기록되었다면, 2026년 한국의 미디어 지형에서 거짓은 훨씬 저렴하고 효율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자본이 진실을 매수하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진실이 '슈퍼챗'과 '조회수'라는 소액 화폐로 잘게 쪼개져 거래되고 있다.

광화문의 한 로펌에서 기업 소송을 담당하는 최수연(가명) 변호사는 한국의 현실을 빗대어 우려를 표한다. "미국은 그나마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어 조 단위의 합의라도 나왔지만, 한국은 언론 보도에 대한 위자료가 기껏해야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수준입니다. 미국에서조차 거액의 합의금이 '면죄부'로 기능하는데, 한국에서는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것이 '남는 장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른바 '사이버 렉카'라 불리는 이슈 유튜버들은 기성 언론이 닿지 못하는 대중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영향력을 행사한다.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제기하고, 문제가 되면 소액의 벌금을 내고 마는 식의 행태가 반복된다. 여의도 정치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이러한 '사이버 확성기'들과 공생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적 갈등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있다.

반전: 진실은 '럭셔리 상품'이 되었나?

도미니언 합의가 남긴 또 하나의 그림자는 '정보의 양극화'다. 2026년 현재, 검증된 사실은 값을 치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 상품'이 되었고, 대다수의 대중은 알고리즘이 무료로 배급하는 '자극'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마포구의 직장인 최수진(32, 가명) 씨는 최근 해외 주식 투자 정보를 얻기 위해 월 30만 원에 달하는 유료 뉴스레터와 외신 구독 서비스를 결제했다. 최 씨는 "무료로 풀리는 기사나 유튜브 정보만 믿고 투자했다가 트럼프 2.0 관세 정책 관련 가짜 뉴스에 속아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며, "이제 '진짜 정보'는 돈을 내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토로했다.

2026 정보 계층화 지수: 구독 비용과 정보 품질의 상관관계

위 차트는 프리미엄 뉴스 구독 비용(premium_cost)과 무료 유통되는 허위 정보의 도달 범위(misinfo_reach)가 2023년 합의 이후 어떻게 디커플링(탈동조화)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프리미엄 정보의 가격이 치솟을수록, 역설적으로 대중이 접하는 정보의 질은 하락하고 있다. 이는 '도미니언 합의'가 미디어 기업들에게 준 교훈이 "거짓말을 하지 말자"가 아니라, "거짓말의 수익이 소송 비용보다 크다면 감수할 수 있다"는 냉혹한 비용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이었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사회 계약: 처벌을 넘어선 투명성으로

결국 1조 원의 배상금이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돈으로 진실을 살 수 없듯, 돈으로 거짓을 완전히 근절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2026년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필요한 것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넘어선 새로운 '미디어 사회 계약'이다.

이는 단순히 가짜 뉴스를 처벌하는 차원을 넘어, 뉴스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알고리즘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민 사회와 학계는 언론사가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보도했는지, AI가 기사 작성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그리고 플랫폼이 어떤 기준으로 뉴스 피드를 배열하는지에 대한 '설명 책임(Accountability)'을 요구해야 한다.

도미니언 합의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얼마를 배상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진실을 용인할 것인가"이다. 자본에 의해 편집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지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