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억 8,750만 달러의 면죄부: '도미니언 판례'는 왜 거짓의 시대를 끝내지 못했나

2023년 4월 18일,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 앞에는 전 세계 미디어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거짓말의 책임'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세기의 재판이 열리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개정 진술은 없었다. 대신 들려온 소식은 폭스뉴스(Fox News)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스(Dominion Voting Systems)에 7억 8,750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1조 4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 명예훼손 소송 역사상 최대 규모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진실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2026년 오늘, 냉정하게 복기해보면 그날의 합의는 승리라기보다 거대 미디어 기업이 치른 '비싼 수업료'이자, 진실을 규명할 기회를 돈으로 산 '면죄부'에 가까웠다. 당시 합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자사의 프라임타임 뉴스 시간에 앵커가 시청자들의 눈을 바라보며 "우리가 보도한 선거 조작설은 거짓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송 사과는 빠져 있었다. 폭스뉴스는 루퍼트 머독 회장이 증언대에 서는 치욕을 피하고, 구체적인 조작의 증거들이 법정에서 낱낱이 공개되어 충성 시청층이 이탈하는 리스크를 막기 위해 기꺼이 1조 원을 '비용(Cost)'으로 처리했다.

'진실 비용'의 일상화: 미디어는 멈추지 않는다
2026년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거액의 명예훼손 합의금은 더 이상 기업의 존폐를 위협하는 '블랙 스완(Black Swan)'이 아니다. 오히려 매 분기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예측 가능한 '운영 리스크'이자, 고수익을 위한 필수적인 '비용(Cost of Doing Business)'으로 전락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더욱 양극화된 미국 정치 지형에서, 확증 편향을 자극하는 보도가 벌어들이는 광고 수익과 구독료는 법적 배상금을 상회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의 미디어 리스크 분석가들은 2023년의 도미니언 합의가 업계에 남긴 교훈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대신 '거짓말을 하되, 법적으로 방어 가능한 수준의 유보금을 미리 쌓아두라'는 냉혹한 셈법이 자리 잡았다. 주요 뉴스 채널들은 2024년 이후 '콘텐츠 책임 보험'과 '소송 충당금' 계정을 대폭 늘렸다. 마치 공장이 오염 물질을 배출하며 환경 부담금을 내듯, 미디어 기업들은 허위 정보를 유포하며 '진실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러한 '진실의 금융화' 현상은 구체적인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3년 당시 폭스사의 주가는 합의 소식 직후 일시적인 변동성을 보였으나, 2026년 현재 주요 보수 미디어 그룹의 시가총액은 오히려 견고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2023년의 합의금 7억 8,750만 달러는 연간 매출 149억 달러를 올리는 기업에게 감당 가능한 리스크 범위 내에 있었다. 이는 '도미니언 판례'가 미디어의 행태를 교정하는 징벌적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히 고수익 고위험 비즈니스 모델의 변수로 편입되었음을 시사한다.
주요 뉴스 미디어의 법률 리스크 충당금 및 연간 수익 추이 (2023-2026)
침묵의 대가: '도미니언 프리미엄'의 역설
법조계에서는 이 거액의 합의금을 '도미니언 프리미엄(Dominion Premium)'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거대 미디어 기업이 치명적인 법적 리스크 앞에서 경영진의 증인 출석과 추가적인 내부 치부의 공개를 막기 위해 지불하는 '침묵의 비용'을 의미한다.
이 거액의 합의가 남긴 가장 뼈아픈 역설은 '법적 정의'와 '사회적 진실'의 괴리다. 당시 합의로 인해 폭스 뉴스의 간판 앵커들은 증언대에 설 필요가 없어졌고, 그들이 사석에서 "선거 사기 주장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으면서도 방송에서는 정반대로 보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은 대중에게 생생하게 전달될 기회를 잃었다.
미디어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거짓말'은 여전히 남는 장사다. 니만 랩(Nieman Lab)의 보고서에 따르면,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케이블 뉴스 채널의 시청자 충성도(Retention Rate)는 중도 성향 채널보다 평균 40% 이상 높다. 이는 곧 광고 단가와 재송신료 협상력으로 직결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에서 시청자들은 '진실'보다 자신의 신념을 '확인'받기를 원하며, 미디어 기업은 이 확증 편향의 수요에 정확히 부응하는 공급을 멈출 이유가 없다.

태평양 건너의 경고: 한국 언론 환경과 징벌적 배상
미국의 사례는 한국 사회에도 묵직한 경고를 던진다. 유튜브와 SNS를 중심으로 '사이버 렉카'와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이 난립하는 한국의 미디어 환경 역시 이와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뉴스 소비자의 유튜브 의존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거대 언론사뿐만 아니라, 팬덤 정치에 기생하여 슈퍼챗으로 수익을 올리는 1인 미디어들이 '증오 비즈니스'의 최전선에 있다는 점이다.
한국 법조계 관계자들은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한국에는 없지만, '돈으로 진실을 덮는'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이나 유력 정치인이 연루된 명예훼손 분쟁이 판결까지 가지 않고 조정이나 합의로 끝나는 비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이 사안의 진상을 명확히 알 권리를 침해하고 가짜 뉴스의 생산자들에게 '걸리면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심어주고 있다.
결국 '도미니언 판례'가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를 배상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배상금을 지불하고서라도 가짜 뉴스를 팔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자본력이 있는 주체에게 징벌적 배상은 면죄부가 될 수 있고, 특정 진영의 유튜버에게 소송은 오히려 '탄압받는 투사'의 훈장이 되어 더 많은 후원금을 끌어모으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법적 제재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는 1조 원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비용을 치르고도 거짓말을 계속하게 만드는 '수익 구조', 그리고 그 거짓말을 기꺼이 소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우리 사회의 '분노의 시장'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