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 칸의 예언과 2026년의 무법지대: AI 사기, 규제 해체의 청구서

되살아난 2024년의 유령
2024년 1월, 리나 칸(Lina Khan) 당시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은 기술 업계의 심장을 겨누며 차가운 경고를 던졌다. "AI는 사기와 기만을 터보차저(turbocharge)할 수 있다." 당시 실리콘밸리의 일부 투자자들과 기술 낙관론자들은 이를 두고 '규제 만능주의자의 기우'라거나 '혁신의 발목을 잡는 관료주의'라며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물러나고 트럼프 2.0 시대가 본격화된 2026년 1월 오늘, 그 발언은 단순한 기술적 예언이 아니라 정책적 방파제가 사라진 미래에 대한 정밀한 부검 리포트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예견된 재난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 단행된 AI 안전 행정명령의 무력화와 FTC 권한 축소는 거대 기술 기업들에게 '무제한 질주'의 신호를 보냈다. 2024년의 리나 칸이 우려했던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규모의 경제'를 갖춘 사기 도구로 전락하는 구조였다. 당시 FTC는 AI 모델 학습 데이터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생성된 콘텐츠에 대한 워터마크 의무화를 추진하려 했다. 이는 사기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현재 미 백악관의 기조인 "규제 철폐를 통한 AI 패권 유지"는 이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터보차저'는 작동했다: 폭증하는 AI 범죄
지난주 버지니아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가명) 이정훈 씨가 겪은 사건은 이 '터보차저'가 어떻게 평범한 가정의 경제적, 심리적 방어선을 무력화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 씨는 딸의 목소리로 "교통사고가 났는데 합의금이 급하다"며 울먹이는 전화를 받았다. 과거의 보이스피싱이 어눌한 말투나 조악한 시나리오로 의심을 샀다면, 2026년의 AI 피싱은 딸의 미세한 말버릇과 숨소리, 심지어 공포에 질린 톤까지 완벽하게 복제해냈다. 이 씨가 송금 직전까지 갔던 이유는 단 하나, 그 목소리가 '데이터'상으로는 딸과 99.9%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다. 범죄의 경제학이 근본적으로 뒤집힌 결과다. 2024년까지만 해도 정교한 딥페이크 음성을 생성하려면 고성능 GPU와 수십 분의 샘플 데이터, 그리고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 다크웹과 텔레그램 등지에서는 단 3초의 목소리 샘플만 있으면 1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실시간 음성 복제 봇을 임대할 수 있다. 과거에는 사기꾼 한 명이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를 직접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자율 AI 에이전트가 수천, 수만 명의 잠재 피해자와 동시에 대화하며 가장 취약한 대상을 '선별(Screening)'한다.
AI 기반 사칭 사기 피해 규모 추이 (2023-2026)
해체된 방어선과 '미국 우선주의'의 청구서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폭주를 제어할 정책적 안전장치가 2026년 현재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리나 칸 위원장 재임 시절 추진되던 '사칭 방지 규정(Rule on Impersonation)' 강화와 AI 워터마크 의무화 논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AI 이니셔티브 행정명령' 이후 동력을 상실했다. "과도한 규제가 미국의 AI 리더십을 저해한다"는 명분 아래, 플랫폼 기업들의 자율 규제에 맡겨진 사기 탐지 시스템은 수익성 모델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규제 공백의 피해는 국경을 넘어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근무하는 (가명) 정수현 씨의 사례는 이 '무법지대'가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정 씨는 최근 미국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AI가 생성한 유명 투자자의 '딥페이크 추천 영상'에 속아 2천만 원 상당의 피해를 입었다. "플랫폼 자체의 인증 마크가 있어 의심하지 않았다"는 정 씨의 항변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해당 플랫폼은 약관상 '콘텐츠의 진위 여부에 대한 최종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다'는 조항을 들어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간 '규제 아비트라지(Arbitrage)'를 발생시켜, 규제가 약한 곳의 기준이 글로벌 표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서울에 던지는 질문: 혁신인가, 방임인가
2026년 1월의 워싱턴이 '규제 철폐'라는 거대한 실험실로 변모하는 동안, 대한민국 여의도는 깊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리나 칸 전 FTC 위원장이 2024년 경고했던 "사기의 터보차저"가 현실화된 미국의 모습은, AI 강국을 꿈꾸는 한국 사회에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미국의 '기술 질주'를 쫓을 것인가, 아니면 유럽식 '안전망'을 택할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한 산업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이 사회적 신뢰를 어떻게 잠식하는지에 대한 생존의 문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AI 기본법'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산업 진흥'과 '이용자 보호'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재계는 트럼프 2.0 행정부의 과감한 규제 완화를 예로 들며, 한국이 '규제 갈라파고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미국의 규제 빗장이 풀린 직후 발생한 사회적 비용은 이러한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청구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술 패권 경쟁에서의 승리가 과연 자국민, 나아가 전 세계 소비자의 안전을 담보로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방어선이 무너진 자리, 그곳에는 혁신의 빛이 아닌 약육강식의 그림자만이 짙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