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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의 역설: 중국, 프랑스를 지렛대로 EU의 빗장을 열다

AI News Team
트럼프 2.0의 역설: 중국, 프랑스를 지렛대로 EU의 빗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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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의 핫라인: 베이징이 파리로 보낸 신호

지난 1월 28일, 베이징의 전화벨이 파리의 엘리제궁을 향해 울렸습니다. 왕이(Wang Yi) 중국 외교부장과 에마뉘엘 본(Emmanuel Bonne) 프랑스 대통령 외교보좌관 사이의 이 통화는 표면적으로는 양국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외교적 의례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의 기류를 읽는 통상 전문가들에게 이 통화는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트럼프 2.0 시대, 더욱 높고 견고해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장벽 앞에서, 중국이 유럽이라는 숨구멍을 확보하기 위해 보낸 전략적 신호였습니다.

현재 글로벌 통상 환경은 살얼음판과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 2년 차를 맞아 대중국 관세 장벽을 전방위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EU) 또한 중국산 전기차(EV)에 대한 반보조금 조사를 무기로 베이징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사면초가에 몰린 중국 입장에서 프랑스는 EU의 대중국 강경 노선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지렛대입니다. 왕이 부장이 본 보좌관에게 "프랑스가 EU 내에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계속해주길 바란다"고 언급한 대목은, 사실상 미국의 압박에 동참하지 말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달라는 외교적 호소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유화 제스처는 한국 경제, 특히 대유럽 수출 기업들에게 복잡한 셈법을 요구합니다. 울산에서 유럽으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는 중견기업 대표 이성민(가명) 씨는 "중국이 미국의 관세를 피해 유럽 시장으로 물량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 우리 같은 기업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며 깊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중국의 손을 잡고 무역 장벽을 낮춰준다면 그것은 '상생'이 아니라 우리에겐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실제로 2025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중국의 저가 밀어내기 수출 공세는 유럽 내 한국산 중간재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셈법 또한 복잡합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왕이 부장의 이번 통화는 바로 이 틈새를 파고든 것입니다. 미국이 공급망을 무기화하는 동안, 중국은 '대화와 협력'을 가장하여 EU의 단일대오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역 마찰 해소가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와 EU의 기술 규제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려는 베이징의 고도로 계산된 기동입니다.

2025-2026 주요국 대EU 수출 증감률 추이 (단위: %)

프랑스라는 지렛대: EU의 '전략적 자율성'을 공략하다

베이징의 외교적 계산기에서 파리는 단순한 유럽의 수도가 아니라, 서방의 단일대오를 허물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이자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렛대입니다. 왕이 부장이 브뤼셀(EU 본부)이 아닌 파리로 향한 것은, 트럼프 2.0 시대의 보호무역 장벽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정밀 타격이었습니다. 1년 전 재집권한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게조차 관세 압박을 가하고 있는 지금,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주창해 온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은 중국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공략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프랑스를 대화의 파트너로 낙점한 배경에는 철저한 이해득실이 깔려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경제는 내부적으로는 연금 개혁 이후 지속된 사회적 갈등과 재정 적자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2.0 개정안으로 인해 핵심 산업인 자동차와 명품 수출길이 좁아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프랑스산 코냑과 화장품에 대한 반덤핑 조사를 유예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마크롱 정부에게 '실리적 명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역 협상을 넘어, 미국 주도의 대중국 포위망인 디리스킹(De-risking) 기조에서 프랑스를 이탈시키려는 고도의 심리전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기차(EV) 공급망에서의 미묘한 기류 변화입니다. 프랑스는 르노와 푸조 등 자국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해 중국산 전기차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왔으나, 배터리 기술과 원자재 수급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입니다. 파리에 주재하는 한국 무역관 관계자들은 이러한 프랑스의 이중적 태도가 한국 기업들에게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프랑스가 중국의 자본 투자를 유치하는 대가로 EU 내에서 중국산 배터리 규제를 완화하는 목소리를 낼 경우, 현지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3사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리옹 인근에서 자동차 부품사를 운영하는 박준호(가명) 대표는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산 배제'가 대세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현실화되자 프랑스 바이어들 사이에서는 '미국도 못 믿는데, 중국의 저가 부품이라도 써서 가격 경쟁력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이는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역설적으로 미국의 우방을 중국의 품으로 떠밀고 있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2025년 프랑스 주요 산업별 대중국 의존도 및 수출 비중

2026년의 철의 장막: 디지털 프라이버시와 전기차

왕이 부장의 미소 뒤에는 베이징의 서늘한 공포가 서려 있습니다. 2026년 1월, EU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디지털 제품 여권(DPP)'과 강화된 '데이터 주권법'은 20세기 냉전 시대의 철의 장막을 디지털 코드로 재구현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2.0 행정부가 관세 장벽을 높이는 사이, 그나마 열려있던 유럽 시장마저 닫힐 위기에 처하자 중국은 생존을 위한 외교적 총공세에 나선 것입니다.

충북 오창의 이차전지 소재 기업 임원 김민성(가명) 상무는 "작년까지만 해도 가격 경쟁력만 있으면 됐지만, 올해부터 EU 클라이언트들이 요구하는 것은 '데이터 투명성'"이라며 "배터리 생애 주기 정보가 어디서 저장되고 누구에게 공유되는지 증명하지 못하면 입항조차 거부당하는 실정"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기술 굴기, 특히 스마트 EV 기업들의 목줄을 죄는 결정타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왕이 부장의 프랑스 방문은 이 견고한 '디지털 장벽'에 균열을 내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고, 중국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에어버스 구매 확대나 프랑스산 꼬냑에 대한 반덤핑 조사 완화 같은 당근책은 표면적인 선물일 뿐, 이면에는 "미국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라"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가 그린란드 매입 추진 등으로 대서양 동맹을 경시하는 듯 보이지만, 대중국 견제에 있어서만큼은 서방 진영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 이 상황은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입니다. 중국이 배제된 공급망에서 한국산 배터리와 전기차의 반사이익이 기대되지만, 동시에 유럽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ESG 및 데이터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중국의 저가 공세가 막힌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기술적 초격차뿐만 아니라, 데이터 신뢰성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합니다.

2025-2026 중국산 전기차(EV)의 주요 지역별 수출 추이 (단위: 만 대)

샌드위치 한국: 고래 싸움과 눈치 보기를 넘어

베이징과 파리 사이에서 오가는 온건한 신호는 여의도와 판교, 그리고 울산의 산업 현장에 즉각적인 파열음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 없는 '샌드위치'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과거의 샌드위치론이 기술 격차에 대한 우려였다면, 2026년의 위기는 '가치 사슬의 단절'이라는 구조적 공포입니다. 미국은 안보를 명분으로 대중국 반도체 및 배터리 공급망 배제를 요구하고, 중국은 거대한 내수 시장과 유럽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한국의 빈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헝가리에 진출한 부품사 대표 박성훈(가명) 씨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준을 맞추기 위해 비용이 상승했는데, 중국 기업들은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한다"며 "유럽 고객사는 중국과의 '디리스킹' 기조와 상관없이 당장 싼 중국산 부품을 선호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 2.0 시대의 역설입니다.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대중 압박 동참을 강요할수록,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유럽은 경제적 실리를 위해 중국의 손을 잡을 유인이 커집니다. 대한상공회의소 SGI가 지적했듯,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이 줄어든 자리를 미국이 채우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경제의 대미 의존도 심화라는 또 다른 리스크를 낳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치 보기가 아닌 '초격차 외교'와 '기술적 대체 불가능성'입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되지 않으려면, 고래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가시'를 가져야 합니다. 정부는 미-중-EU의 삼각 파도 속에서 기업들이 숨 쉴 수 있는 통상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기업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기술적 우위를 통해 협상력을 높여야 합니다. 왕이 부장이 파리에서 내민 손이 우리에게 악수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각성을 위한 경종이 될지는 오직 우리의 대응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