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의 '유엔사 존중' 선언: 트럼프 2.0 시대, 주권보다 생존 택한 전략적 피벗인가?

서울 용산 국방부 브리핑룸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지난 1월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국방부 대변인이 내놓은 한 마디는 그간 물밑에서 감지되던 정부 내 대북 정책의 난맥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유엔군사령부(UNC)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한다."
이 짧고 명료한 문장은 불과 며칠 전 통일부가 비무장지대(DMZ) 내 출입 통제권 문제와 관련해 유엔사의 '월권'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던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메시지였다. 이는 단순한 부처 간 소통의 부재나 엇박자로 치부하기에는 그 시점이 너무나 공교롭다. 바로 '트럼프 2.0' 행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엇갈린 시선: 주권론 대 현실론
통일부의 입장은 명확했다.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남북 간의 특수 관계를 고려할 때, 유엔사의 관할권이 우리 정부의 주권적 결정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는 지난 수년간 이어져 온 '주권 회복'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남북 관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통일부 본연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통일부 관계자는 "정전협정 관리라는 명분 아래 남북 교류의 아주 작은 실무적 절차까지 유엔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이번 "존중" 선언은 이러한 통일부의 목소리를 사실상 봉인해버린 셈이 되었다. 국방부의 태세 전환은 철저히 안보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워싱턴의 기류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1기 때보다 훨씬 더 거래적이고 직설적인 동맹관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SMA) 압박과 전략자산 전개 비용 청구서가 이미 예고된 상황에서, 국방부로서는 미국 측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불필요한 마찰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여의도의 한 군사 전문가는 이를 두고 "국방부가 '주권'이라는 명분보다는 '동맹 관리'라는 실리를 택한 고육지책"이라며,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전선을 확대하지 않으려는 방어적 기제"라고 분석했다.
멈춰선 'DMZ 평화이용법'과 민생의 그늘
이러한 거시적 정책 충돌의 파편은 접경 지역 주민들의 생계로 튀고 있다. 통일부가 추진해 온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법률안'(이하 DMZ 평화이용법)은 사실상 '정전협정 관할권'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 좌초 위기에 처했다. 이 법안은 우리 군과 유엔군사령부(UNC)의 이중 승인을 거쳐야 했던 복잡한 출입 절차를 간소화하고, 비군사적 목적의 활동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유엔사는 정전협정 전문과 제1조를 근거로 "DMZ 내의 모든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에 대한 권한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귀속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며 제동을 걸었다. 파주 민통선 인근에서 2년째 생태 관광 프로그램을 준비해 온 정해진 씨(48·가명)는 "법만 통과되면 '유엔사 통행증' 병목 현상이 사라질 것이라던 정부의 말을 믿고 대출까지 받아 펜션을 리모델링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제 와서 국방부가 유엔사 눈치를 보며 발을 빼면, 우리 같은 소상공인들은 '희망 고문'의 대가만 치르게 되는 꼴"이라고 호소했다.

트럼프 2.0 리스크, 불확실성 제거가 최우선
국방부가 통일부의 기존 입장을 뒤집고 유엔사의 역할 확대에 손을 들어준 배경에는 '불확실성 관리'라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세종 관가와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러한 기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최진우 선임연구위원(가명)은 "과거에는 '주권'과 '자율성'이 국방 정책의 핵심 키워드였다면, 트럼프 2.0 시대인 지금은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최근 안보 관련 고위 당정 협의회의 안건 비중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류는 더욱 명확해진다.
2025-2026 안보 당정 협의회 주요 의제 키워드 빈도 변화
데이터가 보여주듯, 해가 바뀌고 트럼프 2기 출범이 현실화되면서 '남북관계'나 '주권' 관련 논의는 급격히 위축된 반면, '한미동맹'과 '방위비' 등 현실적인 생존 문제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정부는 '주권'이라는 명분보다는 '생존'이라는 실리를 택한 셈이다.
가치 동맹에서 이익 동맹으로
'가치(Value)'라는 포장지가 벗겨진 2026년의 한미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청구서(Bill)'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이번 조치를 두고 '주권의 유보'가 아닌 '리스크 헤징(Risk Hedging)'으로 해석하는 기류가 강하다. 워싱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2.0 시대의 동맹국은 안보 자율성을 주장할수록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불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이진우 교수(가명)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유엔사 문제는 단순한 군사 절차가 아니라,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얼마나 협조적인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지적했다. 즉, 국방부의 전향적인 '유엔사 존중' 발언은 주권의 일부 양보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예측 불가능한 워싱턴의 기류를 안정시키기 위해 던진 전략적 피벗(Pivot)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 동맹'으로서의 전환이 주는 사회적 파장은 만만치 않다. 안보가 경제 논리에 종속되면서, 한반도의 운명이 미국의 계산기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시장에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발표 직후 코스피 시장에서는 방산주가 일시적 반등을 보였으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정학적 리스크의 장기화'를 우려하며 관망세를 유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