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비용 처리: 폭스-도미니언 사태 3년,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

2023년 4월, 델라웨어주 고등법원 앞은 전 세계 취재진으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 폭스 뉴스(Fox News)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Dominion Voting Systems)에 지불하기로 합의한 금액, 7억 8,750만 달러(한화 약 1조 원)는 단순한 배상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허위 정보에 매겨진 역대 가장 비싼 '벌금'이자, 진실이 승리했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이 천문학적 액수가 '가짜 뉴스'의 생산 공장을 멈춰 세울 강력한 제동장치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2026년 1월의 시점에서 되돌아본 그날의 합의는, 거대 미디어 기업이 치른 '비싼 수업료'라기보다 사업 지속을 위한 '필수 비용 처리(Cost of Doing Business)'에 가까웠음이 명백해졌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이곳 서울의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미디어 생태계는 그 어느 때보다 교묘하고 정교하게 분열을 상품화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합의가 남긴 것은 '거짓말을 하면 망한다'는 교훈이 아니라, '거짓말로 얻는 수익이 배상금보다 크다면 비즈니스 모델은 유지된다'는 자본의 냉혹한 셈법이었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된 분노: '포스트 트루스'의 경제학
미디어 분석가들은 2023년의 합의가 역설적으로 '거짓의 효율성'을 입증했다고 지적합니다. 폭스 뉴스는 온에어(On-air) 사과를 하지 않았고, 주요 진행자들은 자리를 옮기거나 독립하여 더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1인 미디어 권력'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트럼프 2.0 행정부의 강력한 규제 완화 기조 속에서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2025년 미디어 분석 기관 '리포트리(Reportree)'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콘텐츠는 중립적 보도에 비해 시청자 참여율이 평균 2.5배 높고, 이는 곧바로 광고 수익과 직결됩니다. 보고서는 "분노, 불안, 혐오와 같은 격렬한 감정은 사용자를 플랫폼에 더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확실한 '연결고리'"라고 분석했습니다. 폭스 뉴스에게 1조 원은 회사의 존립을 위협하는 벌금이 아니라, 핵심 고객층의 충성도를 재확인하고 경쟁사 대비 확실한 '이념적 해자'를 구축하는 데 소요된 투자 비용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주요 뉴스 채널 신뢰도 추이 (2023-2025)
결국 도미니언 소송이 남긴 것은 '진실의 승리'라는 이상적인 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대 미디어 기업이 법적 리스크마저 비용으로 처리하며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차가운 현실, 즉 '진실의 비용처리' 시대를 열었습니다.
워싱턴의 나비효과, 여의도의 태풍
워싱턴에서 발생한 나비의 날갯짓은 3년의 시간을 건너 여의도 정치권과 한국 미디어 생태계에 거대한 태풍으로 상륙했습니다. 미국의 선동적 보도 모델을 이식받은 한국의 일부 종편 채널과 정치 유튜버들에게 폭스뉴스의 사례는 진실의 가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얼마를 벌면 가짜를 팔아도 남는가'라는 자본 논리의 공식을 완성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시사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가명) 정민우 씨는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수차례 법정 제재를 받았음에도 보도 기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는 가짜 뉴스라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주류 언론이 다루지 않는 '대안적 사실'을 제공할 뿐"이라며, "벌금이나 과징금은 일종의 마케팅 비용이다. 자극적인 폭로 하나가 가져오는 슈퍼챗 수익과 신규 구독자 유입으로 얻는 장기적 이익이 법적 리스크를 압도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영미권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강력한 경제적 억제력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법원은 명예훼손에 대해 형사 처벌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사상 위자료 인정 액수는 여전히 수천만 원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2026년의 한국 유튜버들에게 1조 원의 합의금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며, 오히려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알고리즘의 비호 아래 팬덤 정치를 수익화하는 '폭스 모델'의 한국형 변종이 여의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 신뢰도 및 정파적 유튜브 이용률 추이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및 자체 분석)
알고리즘은 반성하지 않는다: AI 시대의 새로운 위협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비용 처리'의 매커니즘이 AI 기술과 결합하여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2026년 현재, 생성형 AI는 팩트 체크의 속도를 훨씬 앞지르는 속도로 정교한 내러티브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인간 앵커와 프로듀서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면, 지금은 알고리즘이 이용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맞춤형 진실'을 실시간으로 합성해냅니다.
서울 여의도에서 근무하는 30대 직장인 (가명) 김민준 씨의 사례는 이러한 변화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최근 김 씨는 소셜 미디어 피드에서 '한국은행의 기습 금리 인상'을 다룬 속보 영상을 접했습니다. 유명 앵커의 목소리와 표정, 심지어 배경 스튜디오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이 영상은 김 씨가 평소 경제 위기론을 다룬 유튜브 채널을 자주 시청했다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추천한 콘텐츠였습니다. 문제는 이 영상이 100% AI가 생성한 '환각(Hallucination)'이었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확증 편향의 자동화 공정'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의 확증 편향이 이용자가 입맛에 맞는 뉴스를 찾아다니는 능동적 행위였다면, 지금은 AI가 이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맞춤형 현실을 떠먹여 주는 수동적 구조로 고착화되었습니다. 폭스 뉴스의 앵커들은 법정에서 "오락적 과장이었다"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블랙박스 모델 안에서 작동하는 AI 알고리즘은 반성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습니다.
AI 생성 허위 정보 노출 경험 및 신뢰도 변화 (2024-2026)
법적 제재의 한계와 신뢰의 재정의
법적 제재가 대중의 인식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단절 현상'은 더욱 심각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역화 효과(Backfire Effect)'는 2026년 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팩트체크 기사나 법원의 판결문은 신념이 다른 집단에게 교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믿음이 공격받고 있다는 위기감을 조성하여 결속력을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됩니다.
결국 해법은 법적 제재를 넘어선 시민사회의 회복탄력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정의는 이제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단순히 '가짜 뉴스를 판별하는 기술'을 넘어, 정보를 전달하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설계 의도를 해독하는 '구조적 문해력'이 요구됩니다.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개별 기사의 진위를 따지는 현미경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정보의 편향 속에 갇혀 있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주요 미디어 연구소들의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이러한 변화는 계층 간 '정보 신뢰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소득층일수록 유료 구독 모델을 통해 검증된 정보를 소비하는 반면, 저소득층이나 디지털 소외 계층은 알고리즘이 무료로 제공하는 자극적인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한국 사회 소득 수준별 뉴스 신뢰도 및 유료 구독 경험 추이 (2023-2026)
2026년, 폭스-도미니언 사태가 남긴 진정한 교훈은 명확합니다. 자본은 거짓말에 가격표를 붙일 수 있지만, 진실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오직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편안한 거짓 대신,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인지적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트럼프 2.0 시대, 그리고 AI가 지배하는 정보의 바다에서 한국 사회가 답해야 할 가장 시급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