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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리얼리즘의 덫: 펀슈머 마케팅과 무너진 안전의 경계

AI News Team
초리얼리즘의 덫: 펀슈머 마케팅과 무너진 안전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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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핸드크림? '초리얼리즘'이 던진 위험한 질문

서울 마포구의 한 대형 잡화점에서 5살 딸과 쇼핑을 하던 박지은(가명) 씨는 최근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험을 했다. 아이가 평소 즐겨 먹던 포도맛 젤리와 똑같이 생긴 제품을 집어 들고 "엄마, 이거 사줘"라고 졸랐기 때문이다. 포장지의 색감부터 말랑말랑한 질감을 연상시키는 폰트까지, 영락없는 간식이었다. 하지만 박 씨가 계산대에 올려놓기 직전 확인한 제품 뒷면에는 '식품이 아니니 절대 먹지 마십시오'라는 작은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젤리가 아니라, 일본의 한 화장품 제조사가 인기 간식 브랜드와 협업해 내놓은 핸드크림이었다.

"만약 제가 꼼꼼히 보지 않고 아이 손에 쥐여줬다면, 아이는 의심 없이 입으로 가져갔을 겁니다. 냄새마저 달콤한 과일 향이라는데, 글을 모르는 아이가 이걸 어떻게 구분하나요?" 박 씨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이처럼 최근 유통가를 강타한 '펀슈머(Funsumer·재미를 좇는 소비자)' 마케팅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단순히 재미있는 제품을 넘어, 실제 식품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게 모방한 '초리얼리즘(Hyper-realism)' 제품들이 쏟아지면서 안전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핸드크림 사례는 출시 직후 SNS를 통해 '재미있는 아이템'으로 입소문을 탔지만, 이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오인 섭취 우려가 너무 크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재미와 화제성, 그 뒤에 숨은 '안전의 외주화'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른 MZ세대와 알파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유통업계가 꺼내 든 '펀슈머' 마케팅은 2026년 현재 기로에 서 있다. 2020년대 초반, 밀가루 브랜드와 맥주의 협업처럼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결합이 주는 의외성에서 출발했던 이 트렌드는, 경쟁이 과열되면서 '괴식'과 '기만' 사이를 오가는 기형적인 형태로 변질되었다. 구두약 디자인을 입힌 초콜릿, 매직 펜 모양의 탄산음료, 우유 팩에 든 바디워시 등은 '반전 매력'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했지만, 동시에 '안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서울의 또 다른 주부 이수진(가명) 씨의 사례는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4살 배기 딸이 문구 브랜드와 협업한 '딱풀 모양 사탕'을 먹고 난 뒤, 실제 문구용 딱풀을 입에 넣으려던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는 것이다. 이 씨는 "아이가 모양이 똑같으니 맛있는 간식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며, "기업이 마케팅 효과를 위해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로 도박을 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국소비자원의 위해 감시 시스템(CISS) 데이터에 따르면, 생활용품을 식품으로 오인해 발생하는 어린이 안전사고는 펀슈머 트렌드가 확산된 이후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기업은 '재미'와 '화제성'을 통해 마케팅 이익을 챙기지만, 그로 인한 오인 섭취와 안전사고의 위험은 오롯이 소비자와 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위험의 외주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셈이다.

'먹지 마시오' 경고문의 한계와 인지적 함정

기업들은 "제품 패키지에 '먹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를 충분히 표기했다"며 법적 책임을 다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이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무용지물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뇌, 특히 인지 발달 단계에 있는 아동이나 판단력이 저하된 치매 노인의 경우 텍스트 정보보다 시각적, 후각적 정보를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형태가 '먹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텍스트로 '먹지 말라'고 적어놓는 것은, 빨간 신호등을 켜두고 건너가라고 손짓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디자인 자체가 '직관적 사고'를 유도하여 오인 섭취를 부추기는 상황에서, 깨알 같은 경고 문구는 면피성 장치에 불과하다.

요양보호사 박철수(가명) 씨는 "치매 어르신들은 익숙한 우유 팩이나 젤리 봉지를 보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드시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 우유 팩 디자인을 차용한 바디워시 제품은 노인들에게 흉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규제의 지체: 글로벌 스탠더드와 트럼프 2.0의 딜레마

문제는 한국의 규제 체계가 여전히 마케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식품 모방 제품'에 대한 규제는 부처 간 칸막이 행정 속에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식품 모방 제품에 관한 지침(Directive 87/357/EEC)'을 통해 소비자가 식품으로 오인할 위험이 있는 비식품의 제조와 판매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오인 가능성'만으로도 규제하는 '사전 예방 원칙'을 고수한다.

2026년 현재, 미국의 트럼프 2.0 행정부가 강력한 규제 완화 기조를 드라이브하며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안전 문제에서만큼은 신중론이 우세하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의 202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식품 모방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감은 마케팅적 흥미를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 모방 제품에 대한 소비자 인식 조사 (출처: 2026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결론: 혁신은 안전 위에서만 유효하다

펀슈머 마케팅의 본질은 '재미'와 '소비'의 결합이다. 그러나 그 재미가 누군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혁신이 아닌 '사회적 흉기'가 된다. 진정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은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제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사용자의 잠재적 위험을 예측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세이프티 디자인(Safety Design)'을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2026년 기업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윤리 덕목이다.

이제 소비자의 눈높이는 단순히 '재미있는 제품'을 넘어 '안전하고 윤리적인 제품'을 지향하는 '세이프슈머(Safesumer)'로 이동하고 있다. 기업이 찰나의 화제성을 위해 안전의 마지노선을 넘을 때, 그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위험한 질주를 멈추고, 소비자의 식탁과 안전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윤리 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