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유령: 줄리아니의 파산과 '지연된 정의'의 청구서

끝나지 않은 2020년의 청구서
2023년 4월,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 앞은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폭스 뉴스(Fox News)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Dominion Voting Systems)에 7억 8,750만 달러(약 1조 원)라는 천문학적 합의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하면서, '세기의 재판'은 싱겁게 막을 내리는 듯했습니다. 거대 미디어 기업은 막대한 현금을 대가로 경영진의 증언대 출석이라는 최악의 리스크를 털어냈고, 사건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26년 1월 30일 현재, 그 합의는 끝이 아닌 서막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업은 '비용 처리'로 빠져나간 자리에, 그 거짓을 설계하고 확성기 노릇을 자처했던 개인들에게는 이자가 복리로 붙은 '지연된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 전 뉴욕 시장의 몰락은 이 '좀비 소송'의 가장 잔혹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2020년 대선 당시 조지아주 선거 관리원이었던 루비 프리먼과 셰이 모스 모녀에게 부과된 1억 4,800만 달러의 배상 판결은, 2026년 현재까지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대한 족쇄입니다.

줄리아니 측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정치적 국면 전환이나 모종의 구제책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국 파산법원은 냉정했습니다.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불법 행위'로 인한 채무는 파산으로도 면책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그를 정치적 영향력의 사각지대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한때 '미국의 시장(America's Mayor)'으로 불리며 9.11 테러 수습을 지휘했던 영웅은, 이제 자신의 이름을 딴 커피 브랜드나 영상 메시지 판매 수익까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한 채, 파산 관재인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챕터 11: 최후의 방패인가, 도피처인가
미국 파산법 11조(Chapter 11)는 본래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하는 경제적 산소호흡기입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이 제도는 줄리아니와 시드니 파월(Sidney Powell) 같은 '거짓의 설계자'들에게 있어 법적 심판을 무기한 유예시키는 강력한 방패이자 도피처로 변질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파산이 '경제적 사망 선고'이자 씻을 수 없는 낙인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미국 정치·법률 엘리트들에게는 전략적 '일시 정지' 버튼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은 사법 정의(Justice)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줄리아니의 사례는 이러한 '법적 갭질(Gap-jil)'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배상 판결 직후 그가 파산 보호를 신청한 순간, 피해자들을 향한 배상 절차는 즉시 동결(Automatic Stay)되었습니다. 2026년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은 법원이 인정한 배상금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 채, 파산 법원의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 속에 갇혀 있습니다. 줄리아니 측 변호인단은 파산 절차를 통해 자산 공개를 지연시키고, 배상금 규모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대폭 삭감하려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법률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태를 두고 "파산 법원이 정치적 책임의 세탁소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미국 법무부 산하 연방관재인(U.S. Trustee)조차 줄리아니의 파산 신청에 대해 "절차의 남용"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으나, 트럼프 2.0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법부 내 기류가 묘하게 흐르며 이들의 지연 전술은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오래된 법언의 잔혹한 증명입니다.
기업의 '비용' vs 개인의 '파멸'
이 사태를 관통하는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자본의 유무'에 따른 운명의 갈림길입니다. 폭스 뉴스가 지불한 7억 8,750만 달러는 천문학적인 액수였지만, 월스트리트의 냉정한 계산기 위에서는 그저 '비즈니스 비용'으로 치환되었습니다. 그들은 돈으로 책임을 샀고, 시스템을 보존했으며, 2026년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여전히 건재합니다.
반면, '법인'이라는 보호막이 없는 개인에게 청구된 거짓의 청구서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시드니 파월은 형사 기소를 피하기 위해 유죄를 인정하고(plea deal) 벌금과 보호관찰을 선택함으로써 '완전한 파멸'은 면했지만, '크라켄'을 자처하던 변호사로서의 직업적 권위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폭스 뉴스가 돈으로 굴욕을 막았다면, 이들 개인은 돈이 없어 굴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기업은 시스템의 일부로서 생존을 도모하지만, 개인은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끼어 부서져 버린 형국입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사법 정의가 '피해의 복구'보다 '가해의 처벌'에 집중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폭스 뉴스의 합의금은 도미니언이라는 기업의 손해를 메워주었지만, 줄리아니에 의한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파산한 노인의 빈 지갑 앞에서 온전히 보상받을 길을 잃었습니다. 결국 법정에서의 승리가 피해자의 삶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한다는, 2026년 사법 시스템의 서늘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 '사이버 렉카'와 책임의 부재
줄리아니와 파월이 법정에서 마주한 파산과 몰락의 서사는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한국 사회의 기시감이 너무도 짙습니다. 2026년의 대한민국은 '유튜브 저널리즘'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무책임한 폭로와 '사이버 렉카'들의 횡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통해 '금융 치료'를 시도했다면, 한국은 여전히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가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용인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미국의 사례는 거짓 정보가 단순히 정치적 선동 도구가 아니라, 거대한 비즈니스 모델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줄리아니 전 시장이 2020년 대선 불복 주장으로 벌어들인 정치 자금과 그가 짊어지게 된 배상금 사이의 괴리는, 진실의 가치보다 선동의 수익성이 더 높게 평가받았던 지난 시절의 청구서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합니다. 수십만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가 허위 사실을 유포해 얻는 슈퍼챗 수입은 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반면, 그로 인한 벌금형은 수백만 원에 불과해 사실상 '영업 비용'으로 처리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의 법조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을 논의하지만, 줄리아니와 파월의 사례는 제도 도입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경고합니다. 파산법을 이용한 '합법적 회피' 기술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확증 편향에 갇힌 팬덤이 그들에게 면죄부와 후원금을 동시에 쥐여주는 한, 법적 단죄는 반쪽짜리 정의에 그칠 공산이 큽니다.
결론: 유령은 법정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4년 대선 승리를 통해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고, 그의 지지층에게 줄리아니와 파월은 '범죄자'가 아닌 '정치적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의 패배가 정치적 자산으로 둔갑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인지 부조화를 대변합니다. 법적 사실(Legal Fact)과 정치적 신념(Political Belief)이 완전히 분리된 채 평행선을 달리는 이 현실이야말로, 2020년이 남긴 진짜 유령입니다.
우리는 지금 '미완의 심판'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법의 망치는 내려쳐졌으나, 그 소리는 광장의 소음에 묻혀버렸습니다. 책임자는 처벌받았으나, 거짓은 살아남았습니다. 2026년의 미국,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한국 사회에 남겨진 과제는 법정 밖의 세상에서 진실의 가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입니다. 유령은 법정에서 퇴마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편리한 거짓'보다 '불편한 진실'을 선택할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