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멈춰선 브뤼셀 협상: '트럼프 2.0' 압박은 한-EU 관계의 구조적 균열을 예고하는가
![[단독] 멈춰선 브뤼셀 협상: '트럼프 2.0' 압박은 한-EU 관계의 구조적 균열을 예고하는가](/images/news/2026-01-30--20--eu--hrfgsg.png)
멈춰선 브뤼셀의 시계: 공식 발표 뒤 숨겨진 긴장감
2026년 1월 30일, 브뤼셀의 시간은 멈췄다. 한국과 유럽연합(EU)의 핵심 관세 협상이 최종 타결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은 차갑게 식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수석대표와 EU 측 카운터파트인 마르쿠스 러트닉 무역 담당 국장의 마지막 회담은 "최종 기술적 세부 사항 조율"이라는 외교적 수사 뒤로 가려진 채 급작스럽게 결렬되었다.
공식 발표는 단순한 '지연'을 시사했지만, 협상장 주변을 감돌던 무거운 공기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통계 모델이나 원산지 규정 같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었다. 판이 흔들리고 있다는 직감이 모두를 짓눌렀다." 협상에 정통한 브뤼셀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익명을 전제로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양측 실무진이 수개월간 공들여 쌓아 올린 합의의 탑이 단 몇 시간 만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문제의 진앙은 브뤼셀이나 세종이 아닌, 워싱턴 D.C.라는 심증이 외교가를 떠돌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는 '트럼프 2.0' 행정부가 동맹국의 독자적인 경제 블록 형성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보내왔다는 분석이다. 이번 협상 결렬은 한-EU 양자간의 이견이 아닌,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만들어낸 '예고된 파열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향후 한국의 모든 통상 외교가 마주할 거대한 구조적 장벽의 등장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탄'으로 기록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 거대한 두 개의 그림자
"한-EU 관세 협상 교착은 양자간의 이견 문제가 아니다." 지난주 브뤼셀에서 만난 익명의 외교 소식통은 협상 결렬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의 지적대로, 협상 테이블 위의 팽팽한 긴장감은 표면적 현상일 뿐, 그 이면에는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나는 '트럼프 2.0'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며, 다른 하나는 예상치 못한 복병, 바로 EU 스스로의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야심이다.
트럼프 2.0의 무역 정책은 1기 행정부보다 한층 더 정교하고 강력해졌다. 2025년 말 브뤼겔 연구소(Bruegel Institute) 보고서에 따르면, 현 미국 행정부는 노골적인 관세 위협과 함께 '동맹국 책임론'을 연계하는 양동 전략을 구사한다.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유럽산 전기차에 '북미산 배터리 사용 의무' 같은 비관세 장벽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EU에게는 중국산 부품을 쓰는 제3국 제품에 대한 공동 규제를 요구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번 협상 지연을 단순히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수동적 반응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제 및 기술 블록을 구축하려는 EU의 거대한 야심, 즉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관철하기 위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EU는 반도체(EU Chips Act), 원자재, 배터리 등 핵심 산업 공급망을 역내로 이전하고, 디지털 서비스법(DSA)과 같은 강력한 규제로 미국 빅테크에 맞서는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실행 중이다. 최근 EU가 일론 머스크의 X(구 트위터)에 탑재된 AI '그록(Grok)'의 가짜뉴스 확산 가능성에 대해 DSA 위반 조사를 개시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EU는 한국과의 관세 협상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글로벌 표준을 관철하는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유럽의회 무역위원회(INTA)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EU는 한국 측에 EU의 데이터 주권 규정(GDPR)과 동등한 수준의 개인정보보호 기준 및 AI 규제안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기술 가속화를 위해 규제 철폐를 내세우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한국 산업
결국 한국은 두 거대 블록의 힘겨루기 최전선에 내몰렸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각자의 '경제 안보'를 방패 삼아 성벽을 높이는 지금, 그 성벽 사이에 끼어버린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와 같은 '전략적 자산'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국가안보 반도체법'과 EU의 '유럽 반도체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강요받고 있다. 미국 시장 접근성을 위해 워싱턴의 요구를 수용하면 유럽 내 생산기지 운영이 EU의 규제와 충돌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국제무역협회(KITA)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 반도체 수출의 약 40%가 중화권을 제외하면 미국과 EU 시장에 집중되어 있어,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구조다.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현대차와 기아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해 조지아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지만, 동시에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라는 또 다른 장벽에 직면했다.
"미국 바이어는 북미산 부품 비율을 70%까지 맞춰달라고 요구하고, 독일 바이어는 유럽 내 생산 부품 공급을 압박합니다. 같은 부품을 두고 생산기지를 이원화하라는 건데, 저희 같은 중소 협력업체는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경기도 안산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 박성민 부장(가명)의 토로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가 된 한국 제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산업연구원(KIET)은 이러한 비관세 장벽이 현실화될 경우, 2027년까지 한국 자동차 및 배터리 산업의 수출액이 최대 150억 달러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줄타기 외교'의 종말, 새로운 항해술은 무엇인가
미-중 갈등이라는 익숙한 파도를 넘어, 이제는 대서양마저 갈라놓는 '트럼프 2.0'의 고립주의 파고가 닥쳐왔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요약되던 '안미경세(安美經世)' 전략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미국과 EU라는, 두 핵심 파트너 사이에서 더 복잡하고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결국 작금의 상황은 우리에게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줄타기 외교'를 넘어선 새로운 생존 전략을 요구한다. 이는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를 넘어, 다자간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경제 주권을 지키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고차원적인 '네트워크 외교'로의 진화를 의미한다. 동맹이라는 전통적 가치와 경제적 실리라는 현실적 목표 사이의 균형점을 재설정해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과거의 항해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지정학적 폭풍 속에서, 우리는 이제 어떤 깃발을 올리고 어느 방향으로 키를 돌려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