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ALK.
Economy

스미소니언의 건배사, 그 뒤의 청구서: 이건희 컬렉션과 트럼프 2.0의 거래

AI News Team
스미소니언의 건배사, 그 뒤의 청구서: 이건희 컬렉션과 트럼프 2.0의 거래
Aa

워싱턴의 밤, 한국의 미(美)와 미국의 셈법이 교차하다

워싱턴 D.C.의 차가운 겨울 바람도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ational Museum of Asian Art) 안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29일 밤(현지시간), '세기의 기증'이라 불리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갈라 디너가 열린 이곳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었습니다. 국보급 백자와 겸재 정선의 산수화가 뿜어내는 은은한 한국의 미(美) 사이로, 턱시도를 차려입은 워싱턴 정가와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분주히 오갔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끈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 상무장관이었습니다.

러트닉 장관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거론해온 '보편적 관세 10%'와 '반도체 보조금 재검토'라는 살벌한 칼날 위에서, 삼성가를 비롯한 한국 재계가 마련한 이 화려한 연회는 사실상 생존을 위한 절박한 구조 신호이자 고도의 로비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박물관 벽에 걸린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평온함을 노래하고 있을 때, 테이블 아래에서는 한국 반도체의 운명을 건 치열한 셈법이 오갔습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따르지요." 현장에서 만난 한 워싱턴 소식통의 말처럼, 이날의 건배사는 달콤했으나 그 뒤에 숨겨진 청구서는 가혹했습니다. 러트닉 장관은 축사에서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언급하면서도, "미국 내 제조 역량 강화"와 "공정한 무역"이라는 트럼프 2.0의 핵심 키워드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미국에 더 많은 공장을 짓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그렇지 않을 경우 가해질 관세 폭탄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습니다.

러트닉의 건배사: 단순한 축하인가, 협상의 신호탄인가

이날 갈라 현장은 표면적으로는 동양 미학의 극치를 찬양하는 문화적 연대의 장이었으나,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잔을 들어 올린 순간 공기는 단순한 축하 그 이상의 긴장감으로 얼어붙었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경제 안보 정책을 설계한 실권자이자 대중국 고관세 장벽의 설계자로 불리는 그의 참석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보내는 무언의 청구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러트닉 장관은 이날 건배사에서 한국의 예술적 유산을 "위대한 동맹이 공유하는 가치의 정수"라고 치켜세우면서도, "공정하고 호혜적인 무역 질서 속에서만 이러한 문화적 번영이 지속될 수 있다"는 뼈 있는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이는 과거 '가치 동맹' 담론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2026년 현재 미 상무부가 추진 중인 '범용 관세(Universal Baseline Tariff)'와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상호주의 관세' 적용 여부를 결정짓는 가늠자가 결국 한국 기업들의 미국 내 추가 투자 규모와 대중국 공급망 차단 수위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번 갈라를 두고 '반도체 칩(Chip)을 위한 소프트 파워의 소모전'이라는 냉소적인 평가가 나옵니다. 익명을 요구한 미 상무부 핵심 관계자는 "러트닉 장관의 동선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며, "이건희 컬렉션이 가진 상징성을 이용해 한국 경제계에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2.0' 요구사항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라고 귀띔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수사 뒤에 숨겨진 경제적 압박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실존적인 공포로 다가옵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본사로부터 미국 내 생산 시설 확충 계획이 확정되기 전까지 신규 설비 투자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치권에서는 K-컬처를 앞세워 한미 동맹이 굳건하다고 홍보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온도 차는 극명합니다.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는 압박은 결국 국내 일자리 감소와 반도체 생태계의 공동화(Hollowing out)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대미 투자액 대비 관세 면제 혜택 시뮬레이션 (출처: 2026 산업연구원 전망치)

위 지표는 트럼프 2.0 정부 출범 이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직면한 유무형의 '동맹 비용' 변화를 보여줍니다. 투자액은 급증하지만, 그에 따른 관세 면제 혜택의 효용은 점차 감소하는 '수확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외교적 카드: 반도체 방패가 된 예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호스트로 나선 이 자리에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삼성에게 '이건희 컬렉션'은 단순한 유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故) 이건희 회장이 남긴 '문화 반도체'이자,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 축소와 보편적 관세 부과라는 파도 앞에서 삼성이 단순한 '제조 하청업체'가 아닌 미국 사회의 문화적 자산(Asset)을 풍요롭게 하는 '파트너'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적 자산입니다. 텍사스 테일러 시의 파운드리 공장이 '하드웨어'라면, 스미소니언의 갤러리는 그 공장을 지키기 위한 '소프트웨어'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방패'가 과연 실질적인 '관세 면제권'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워싱턴 현지의 무역 전문가들은 "화려한 갈라 디너의 사진은 내일 아침 신문 1면을 장식하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갈 관세 행정명령을 막을 수는 없다"고 냉소합니다. 미국 정계는 한국 재벌의 후원을 기꺼이 즐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미국 노동자'를 명분으로 등을 돌리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넥타이를 푼 삼성, 계산기를 든 백악관: 향후 시나리오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의 샴페인 잔이 치워진 다음 날, 워싱턴의 기류는 냉정하게 돌아섰습니다. 삼성의 '문화 외교'가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백악관 웨스트윙의 계산기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향후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좁혀집니다.

첫째, **조건부 면세 및 보조금 협상(Quid Pro Quo)**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유일주의'에 가까운 공급망 내재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갈라를 통해 구축된 라인은 삼성에게 텍사스 테일러 공장의 조기 가동과 추가적인 R&D 센터 이전을 요구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친구 삼성이 미국의 예술과 산업을 모두 부흥시키고 있다"는 트럼프식 수사(rhetoric)는 역설적으로 삼성에게 거부하기 힘든 청구서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둘째, 보다 비관적인 대중(對中) 반도체 장비 반입의 전면적 차단 시나리오입니다. 스미소니언에서의 환대는 "우리가 가족이니, 적과의 거래를 끊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026년 현재, 미 정부는 레거시 공정(구형 반도체)까지 중국 제재 범위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삼성전자가 시안 낸드 공장의 출구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2026년 상반기 한·미 반도체 설비 투자 전망 (단위: 억 달러)

결국 이번 스미소니언 회동은 삼성에게 시간을 벌어준 것일 뿐, 근본적인 리스크를 해소한 것은 아닙니다. 문화가 국경을 넘을 때, 자본은 국경 안에 갇히기를 강요받는 이 모순적인 2026년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이건희 회장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 반도체 패권 전쟁의 인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