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카르텔: 변희수 재단 설립 지연과 2026년 인권위의 구조적 마비

다시 소환된 2024년의 기억: 멈춰선 등록 절차
2024년 10월,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대회의실의 공기는 무거웠습니다. 당시 고(故) 변희수 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변희수 재단'의 설립 준비위원회는 법인 설립을 위한 절차적 문턱 앞에 서 있었습니다. 단순한 행정 절차로 끝날 수 있었던 사단법인 설립 허가는 안창호 위원장 체제 하의 인권위 전원위원회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습니다. 당시 회의록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이 과정에서 작동한 것은 단순한 '검토'가 아닌 정교한 '지연의 기술'이었습니다.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이른바 '안건 섞기(Agenda Mixing)'였습니다. 당시 인권위 집행부는 변희수 재단 설립 안건을 단독으로 처리하는 대신, 성소수자 반대 활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의 법인 설립 건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았습니다. '기계적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인권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기관이 인권 옹호 단체와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한 단체를 '양립 가능한 이해관계자'로 격하시킨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재단 설립 실무를 도왔던 한 활동가는 "마치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테이블에 앉혀놓고 '둘 다 의견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폭력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이러한 '안건 섞기'는 2024년 하반기 내내 인권위의 의사결정 구조를 마비시켰습니다. 안 위원장 취임 이후 인권위원들 사이의 고성은 일상이 되었고, 안건은 본질적인 논의보다는 절차적 공방으로 흐르기 일쑤였습니다. 변희수 재단 설립 건은 '숙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기한 보류'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적 태만이 아니었습니다. 특정 의제에 대한 혐오 정서를 행정 절차의 틈새로 끼워 넣어, 국가 기관의 공식적인 인정을 막아세운 '제도적 침묵'의 시작이었습니다.
2026년 현재, 그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인권위의 시계는 여전히 2024년의 겨울에 멈춰 있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강화된 '반(反) PC(Political Correctness)' 기조는 한국의 보수적인 인권 행정에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당시의 '보류' 결정은 이제 관행으로 굳어져, 성소수자 관련 안건은 아예 상정조차 되지 않거나, 상정되더라도 '사회적 합의'라는 모호한 기준에 가로막혀 자동 폐기되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당시 인권위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한 법조계 인사는 "2024년의 사건은 인권위가 '인권의 보루'에서 '이념의 전장'으로 변질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변희수 하사의 복직 소송 승소라는 사법부의 판단조차, 인권위라는 행정 기구 안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2026년에도 여전히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서류 더미와 싸워야 하는 소수자들의 현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2024년에 멈춰버린 그 행정 절차 하나가, 어떻게 한국 사회 전체의 인권 감수성을 2년 전으로, 아니 그보다 더 먼 과거로 되돌려 놓았는지 직시해야 할 시점입니다.
‘기계적 중립’이라는 이름의 폭력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심의실 공기는 2024년 안창호 위원장 취임 이후 미묘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변질되었다. 과거 인권위가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확성기로 증폭시키는 곳이었다면, 2026년 현재의 인권위는 거대한 '소음 중화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소위 '안건 섞기'라 불리는 교묘한 의사일정 배정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차별 시정이라는 인권위의 본령을 무너뜨린 결정적 트리거였다.
가장 대표적인 수법은 명백한 인권 침해 사건을 다룰 때, 그에 반대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단체의 민원을 '동일한 비중'의 안건으로 상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차별 시정 권고안을 논의하는 테이블 바로 옆에 '성소수자 반대 집회의 자유 침해'를 주장하는 안건을 나란히 올리는 식이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공정해 보일지 모르나, 실질적으로는 가해와 피해의 위계를 지우고 인권을 '찬반 토론'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인권 보호라는 절대적 가치가 이해관계의 조정이라는 상대적 가치로 치환되는 순간, 인권위의 칼날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계적 중립이 초래한 폭력은 현장에서 구체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 2년째 인권위의 진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명) 김서연 씨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김 씨는 2024년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 해고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과거였다면 긴급 구제 조치나 차별 시정 권고가 논의되었을 사안이다. 그러나 김 씨의 사건은 소위원회에서 1년 넘게 계류되다 전원위원회로 회부되었고, 그곳에서도 '사회적 합의'와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주장하는 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멈춰 섰다.
김 씨는 "나를 공격한 사람들의 논리가 인권위 회의록에서 '존중받아야 할 다른 의견'으로 포장되는 것을 보며 더 큰 절망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에게 인권위는 최후의 보루여야 했으나, 안창호 체제 이후의 인권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원탁에 마주 앉히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하는 방관자가 되어버렸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지연이 아니다. 국가 기관이 혐오 발언에 '시민권'을 부여하고, 차별을 '의견'으로 승인해 주는 공인 인증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차별 시정 권고 및 기각 현황 (2023-2025)
통계는 이러한 구조적 퇴행을 거짓 없이 증명한다. 2023년까지 꾸준히 유지되던 차별 시정 권고 건수는 안창호 위원장 취임 첫해인 2024년을 기점으로 급락했고, 반면 기각이나 각하 결정은 폭증했다. 특히 2025년 통계를 보면, 사회적 논쟁이 첨예한 사안일수록 인권위가 판단을 유보하거나 기각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합의'라는 명분 아래 소수자의 절박한 호소를 다수결의 논리로 짓누르는, 민주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가 인권 기관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물타기' 전략은 결국 인권위 무용론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위험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차별해도 괜찮다, 논란만 만들면 인권위도 어쩌지 못한다"는 학습 효과다. 혐오 세력은 이를 악용해 조직적으로 맞불 민원을 넣으며 인권위의 행정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2026년 현재, 변희수 재단이 지적하는 '멈춰버린 시계'는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기계적 중립이라는 환상 뒤에 숨어, 마땅히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인권위의 직무 유기가 만들어낸, 차갑고도 잔혹한 현실의 시간이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가해자의 목소리까지 경청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중립인가, 아니면 불의에 대한 가장 비겁한 동조인가?
식물 인권위의 그늘: 2년의 공백이 남긴 것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를 가리켜 '사회적 약자의 마지막 보루'라 칭하던 시절은 이제 2026년의 시점에서는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집니다. 2024년 안창호 위원장 취임 이후 본격화된 인권위의 기능 마비는 단순한 행정적 지연을 넘어, 한국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퇴행시키는 거대한 구조적 침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난 2년간 인권위가 멈춰선 자리에는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한숨만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서울의 한 중견 IT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다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가명) 박지훈 씨의 사례는 '식물 인권위'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서늘한 증거입니다. 박 씨는 2024년 말, 사내 괴롭힘과 차별적 처우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과거의 인권위라면 긴급 구제 조치나 권고안이 논의되었을 시점이지만, 2026년 1월 현재까지 박 씨가 받은 것은 "위원 구성 문제로 심의가 지연되고 있다"는 건조한 통지서뿐입니다. 박 씨는 "마지막 희망이라 믿었던 국가 기관이 내 목소리를 '보류' 안건으로 분류해 캐비닛 속에 가둬버린 느낌"이라며 절망감을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지연은 우연한 실수가 아닌, 치밀하게 계산된 구조적 태업의 결과라는 지적이 지배적입니다. 2024년부터 전원위원회와 상임위원회에서 반복된 이른바 '안건 섞기' 전략은 인권위의 의사결정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조례나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와 같이 위원장과 특정 위원들의 성향에 반하는 안건들이 상정될 때마다, 절차적 하자를 문제 삼거나 덜 시급한 안건들과 묶어 논의를 공전시키는 방식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는 인권위 내부의 건강한 토론을 봉쇄하고, 시급한 인권 현안을 '정치적 쟁점'으로 변질시켜 본질을 흐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실제로 인권단체 연석회의가 2025년 발표한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안창호 체제 출범 이후 인권위의 정책 권고 수용률은 전임 위원장 시기 대비 40% 이상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진정 사건의 평균 처리 기간이 2배 이상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정의는 타이밍이 생명이지만, 현재의 인권위는 그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놓치고 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권위에 가봤자 소용없다"는 패배감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며, 갑질과 차별을 일삼는 가해자들에게는 면죄부를, 피해자들에게는 침묵을 강요하는 시그널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2026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각자도생'과 '자국 우선주의'가 거세지면서 소수자 보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는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부적 환경 속에서 내부의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할 인권위조차 기능을 멈춘 현실은 한국 사회의 인권 지형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변희수 하사의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고통'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인권위는 그 존재들을 인정하고 보호하기는커녕, 행정적 절차라는 명분 뒤에 숨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2년의 공백, 그 멈춰버린 시계 바늘을 다시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변희수들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국가라는 시스템이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데 실패했을 때, 그 사회를 지탱하는 '정의'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겠습니까?
국제사회의 시선: 한국 인권의 현주소
2026년 1월, 제네바의 공기는 한국에게 유독 차갑게 느껴진다. 대한민국이 지난 20여 년간 당연시 여겨왔던 '인권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이 벼랑 끝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GANHRI) 승인소위원회의 심사가 예정된 가운데,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A등급' 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외교가 안팎에서 파다하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등급 조정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사회는 한국 인권위가 지난 2년간 보여준 침묵과 지연을 '독립성 상실'의 명백한 징후로 해석하고 있다.
2024년 안창호 위원장 취임 이후 본격화된 이른바 '안건 섞기'와 소위원회의 의결 무력화 시도는 2026년 현재, 국제 인권 규범인 '파리 원칙(Paris Principles)' 위반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파리 원칙은 국가 인권 기구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핵심으로 하는데, 인권위가 특정 정치적, 종교적 편향에 휩쓸려 故 변희수 하사 순직 인정 권고와 같은 시급한 현안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표류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제네바 현지에서 국제 인권 기구들과 소통해 온 (가명) 박민우 씨는 "과거 한국은 아시아 인권의 등불로 불렸지만, 지금은 '경제만 선진국, 인권은 개발도상국'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트럼프 2.0 시대의 도래로 국제 질서가 자국 우선주의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스스로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외교적 자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주요 국가 인권 기구 신뢰도 지수 변화 (2023-2026)
실제로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와 고문방지위원회 등은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지연과 성소수자 인권 보호 미비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해왔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러한 국제적 권고를 국내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는커녕, 내부의 절차적 늪에 빠져 의견 표명조차 유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변희수 재단 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인권위의 미온적 태도는 이러한 구조적 마비가 어떻게 구체적인 개인의 삶과 명예를 훼손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이러한 '인권 외교'의 실종은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과 포용성을 이야기하며 사랑받는 동안, 정작 그 문화가 뿌리내린 본토의 제도적 토양은 척박해지고 있다는 모순은 외신의 주요 비평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등을 통해 기업의 인권 경영을 강제하는 흐름 속에서, 국가 차원의 인권 감수성 저하는 한국 기업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으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결국 2026년의 인권위는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조직'을 넘어,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국제적 척도를 후퇴시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안창호 체제가 남긴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책임 방기'였다는 국제사회의 평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등급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신뢰임을 시사한다. 과연 우리는 멈춰버린 인권의 시계를 다시 돌릴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이대로 국제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날 것인가.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서늘한 질문이다.
변화된 사회, 굳어버린 제도
2026년 1월의 대한민국은 '공정'과 '상식'에 대한 시민들의 눈높이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 시기입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성별, 정체성, 노동 형태를 불문하고 '부당한 차별'에 대해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시계가 분 단위로 빠르게 돌아가는 동안, 서울 중구 삼일대로에 위치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시계는 2024년에 멈춰 서 있습니다. 변희수 재단의 출범은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인권위의 침묵은 그들이 서 있는 제도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위원장 취임 이후인 2024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안건 섞기'와 '회의 지연 전술'은 2026년 현재, 하나의 견고한 관행으로 굳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인권위의 존재 이유였다면, 현재는 논쟁 자체를 회피하거나 절차적 흠결을 핑계로 안건을 무기한 표류시키는 것이 새로운 '뉴노멀'이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태만이 아닙니다. 인권위 내부 관계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이를 "인권의 행정화(Administratization of Rights)"라고 부르며, 인권위가 가치 판단의 기관에서 단순 민원 처리 기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좌절감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입니다. 공익인권법률 상담을 주로 수행하는 (가명) 이준호 변호사는 최근 인권위의 진정 처리 속도에 대해 혀를 내둘렀습니다. "2023년까지만 해도 늦어도 6개월이면 나오던 권고 결정문이, 이제는 1년이 넘도록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옵니다. 명백한 차별 행위에 대한 판단이 늦어지니, 피해 당사자들은 법적 구제를 포기하거나 사적인 영역에서 '갑질'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준호 변호사의 증언처럼, 제도의 지체는 곧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가 기관이 멈춰 선 자리에는 힘의 논리가 다시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2026년 대한민국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트럼프 2.0 시대,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며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 논리는 더욱 교묘해졌습니다. 과거 인권위는 이러한 갈등의 최전선에서 헌법적 가치를 기준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권위는 첨예한 젠더 갈등이나 소수자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전원위원회 개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사소한 문구를 문제 삼아 안건을 소위원회로 되돌려 보내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2026년의 시민들은 묻고 있습니다. 인권위가 말하는 '신중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신중함인지 말입니다. 변희수 하사의 비극 이후 우리 사회는 더디지만 분명하게 변화해 왔습니다. 기업들은 ESG 경영의 일환으로 다양성 존중을 내세우고,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 인권에 대한 논의가 일상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인권의 보루를 자임해야 할 국가 기관은 2년 전의 절차적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변화된 사회와 굳어버린 제도 사이의 이 거대한 간극, '지체된 정의'는 과연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인권위의 시계가 다시 돌지 않는 한, 2026년의 대한민국은 인권 선진국이 아닌, 행정 편의주의가 인권을 압도한 '관료주의 공화국'으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