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쇼크: 현대차 4조 증발이 던진 '동맹 청구서'의 경고

4조 1100억 원의 청구서
여의도 증권가는 지난 1월 25일 현대자동차의 실적 발표를 '검은 목요일'로 기록했습니다. 단순히 숫자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매출은 역대 최대 수준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9.5% 급감하며 4조 1100억 원이 증발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경영상의 미스매치나 환율 효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는 2026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한국의 간판 기업에게 내민 첫 번째 공식적인 '동맹 청구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위기'를 말할 때 제품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이번 현대차의 어닝 쇼크는 제품이 너무 잘 팔려서 문제인, 전례 없는 '역설적 위기'입니다. 미국 시장 점유율은 11%를 넘나들며 견고하지만, 대미 수출 관세 인상과 현지 생산 비용 급증이라는 이중고가 이익률을 잠식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가 '투자하면 보조금을 주는' 당근책이었다면, 트럼프 2기의 산업 정책은 '시장을 내줄 테니 입장료를 내라'는 채찍질에 가깝습니다. 그 입장료의 가격표가 바로 이번 분기에 증발한 4조 원인 셈입니다.

울산 공장 인근에서 15년째 2차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박종훈(가명) 대표의 목소리는 현장의 당혹감을 대변합니다. "물량은 그대로인데 마진이 안 남습니다. 원청에서 내려오는 단가 압박이 예년과 다릅니다. '미국 관세 방어 분담금' 명목으로 납품가 인하를 요구받고 있는데, 이건 기업 간의 갑질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비용 전가입니다." 박 대표의 증언은 현대차의 위기가 울산의 골목 상권까지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두고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과거의 디스카운트 요인이 북한 리스크나 지배구조 문제였다면, 2026년의 디스카운트는 '지정학적 비용(Geopolitical Cost)'입니다. 삼성증권과 골드만삭스의 최근 리포트가 지적했듯, 한국 기업들은 이제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과거보다 30% 이상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적 늪에 빠졌습니다.
현대차 영업이익 추이 및 '미국 정책 비용' 추산 (단위: 조 원)
위 차트는 2025년의 영업이익 급락이 경영 효율성 저하가 아닌, '정책 비용'의 급격한 상승과 맞물려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2023년만 해도 미미했던 정책 비용 효과(관세, 현지화 강제 비용 등)가 2025년에는 4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현대차 한 곳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터리, 반도체 등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주력 산업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시한폭탄입니다.
결국 이 4조 1100억 원은 현대차가 못 벌어서 잃은 돈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미국 중심의 공급망에 잔류하기 위해 지불한 거대한 회비인 셈입니다. 문제는 이 청구서가 '일회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보편 관세가 본격화될 2026년 하반기에는 이 비용이 두 배로 불어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옵니다. '수출이 살길'이라던 한국 경제의 오래된 신화는, '수출할수록 비용을 치르는' 새로운 딜레마 앞에서 길을 잃고 있습니다.
무너진 '대미 투자'의 방파제
지난 2022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약속했던 105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는, 당시 재계에서 '생존을 위한 신의 한 수'로 평가받았습니다.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에 들어선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막아줄 견고한 방파제이자, 미국 시장 내 점유율을 영구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입장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2026년 1월 현재, 트럼프 2.0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그 방파제는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투자'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보호무역주의라는 괴물에게 바친 '일회성 공물'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2.0 시대의 백악관은 더 이상 '동맹의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가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한 '청구서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지난달 발표된 미 상무부의 새로운 행정 명령은 한국 기업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미국 내에 공장을 지었더라도, 그 공장에 들어가는 부품의 원산지 비율과 노동 조합 가입 여부, 심지어는 기업의 지배 구조까지 문제 삼아 보조금 지급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이든 정부 시절 약속된 세액 공제 혜택을 사실상 무효화하는 조치이며, 현지 생산을 통해 관세 장벽을 넘으려던 현대차의 전략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정타였습니다.

현장의 혼란은 숫자로 증명됩니다. 현대차 1차 협력사로서 조지아주에 동반 진출한 자동차 부품 기업의 임원 김철수(가명) 씨는 "2년 전만 해도 미국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지만, 지금은 생존을 위협하는 족쇄가 되었다"고 토로합니다.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 현지 인건비는 한국 대비 2.5배에 달하는 반면, 약속받았던 주 정부의 인센티브는 연방 정부의 규제 강화로 인해 지급이 유예되거나 축소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보편적 기본 관세(Universal Baseline Tariff)'가 한국산 중간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될 조짐을 보이면서, 현지 생산의 원가 경쟁력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습니다.
현대차 그룹 대미 투자에 따른 기대 이익 vs 실제 비용 부담 추이 (2023-2026)
더욱 뼈아픈 것은 이러한 비용 청구가 현대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등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산업 전반이 유사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안전하다"는 1차원적인 등식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2.0 시대의 미국은 자국 내 생산 기지를 확보한 뒤, 그 기지를 인질 삼아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는 '가두리 양식' 전술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현대차의 4조 원 증발 사태는 개별 기업의 실적 부진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이 맹신해 온 '대미 투자 만능론'이 붕괴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부품 생태계의 도미노 붕괴
현대차의 어닝 쇼크가 여의도 증권가를 강타한 다음 날, 울산 매곡일반산업단지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서울의 투자자들이 주가 방어 논리로 '주주 환원'을 외칠 때, 이곳의 2차, 3차 협력업체 사장들은 생존을 위한 '현금 확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현대차가 받아든 미국발(發) 청구서가 하청의 하청으로 전가되는, 이른바 '고통의 낙수효과'가 시작된 것입니다.
울산에서 20년 넘게 자동차 엔진 부품을 가공해 온 정영식(가명) 대표의 공장은 지난주부터 야근을 없애고 주간 2교대로 전환했습니다. "원청에서 내려온 공문에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원가 경쟁력 제고 협조'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상은 납품 단가 7% 인하 통보였습니다." 정 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관세 폭탄과 현지화 요구 조건을 맞추기 위해 현대차가 짊어져야 할 비용이 고스란히 울산과 창원의 영세 업체들에게 전이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이는 단순한 '갑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의 단가 인하가 대기업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2026년의 단가 인하는 한국 제조업 생태계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기 위해 가장 약한 고리를 희생시키는 구조적인 폭력에 가깝습니다. 산업연구원의 최근 보고서가 지적했듯, 완성차 업체의 영업이익률이 1% 포인트 하락할 때 2, 3차 벤더의 영업이익률은 평균 2.5% 포인트 급락하는 '충격 증폭' 현상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창원 국가산업단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전기차 전환(EV Shift) 과정에서 내연기관 부품 수요가 줄어드는 와중에 터진 이번 '서울 쇼크'는 한계 기업들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창원의 한 주물 업체 임원은 "미국 수출길이 막힌 완성차 업체가 내수 물량마저 줄이면서, 고정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토로했습니다. 부품 생태계의 허리가 무너지면, 결국 그 충격은 다시 완성차 업체의 품질 저하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는 부메랑이 될 것입니다.
'상생(相生)'이라는 구호가 무색해진 지금, 한국 자동차 산업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동맹국의 비용 청구서를 가장 힘없는 하청 업체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는, 2026년 이후 전개될 더 거친 무역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완성차 vs 2·3차 협력사 영업이익률 추이 (2023-2026)
'피해자'라는 달콤한 착각을 넘어
현대차 그룹이 발표한 4분기 실적 쇼크 직후, 양재동 사옥과 여의도 정가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트럼프 리스크'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이렇게까지 급진적일 줄은 몰랐다"는 경영진의 항변은 마치 이번 사태가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天災地變)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복기해보면, 지금의 사태는 예고된 인재(人災)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강대국 논리에 희생된 '피해자'로 포장하는 데 골몰하느라,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을 허비했습니다.
울산 북구 매곡산업단지에서 2차전지 부품을 생산하는 김도훈(가명) 대표의 공장은 지난달부터 가동률이 60%대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이번 위기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이미 2년 전, 바이든 행정부 시절 IRA가 통과될 때부터 미국 시장은 '닫힌 문'이 되고 있었습니다. 트럼프 2.0은 그 문을 쾅 닫고 빗장을 걸었을 뿐이죠. 그런데도 원청업체들은 미국 공장 증설에만 매달리며 우리 같은 하청업체들에게도 동반 진출을 강요했습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한국 자동차 산업 생태계는 '미국 올인'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고, 그 청구서가 이제야 날아온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 부품 수출의 대미 의존도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명분 아래 단행된 '탈중국' 행렬이, 다변화가 아닌 또 다른 '편중'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워싱턴의 기류가 '동맹 존중'에서 '거래 중심'으로 바뀌는 동안, 우리 정부와 기업은 "한미 동맹은 굳건하다"는 정치적 수사에만 취해 실질적인 플랜 B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은 돌발 변수가 아니라, 2016년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그의 핵심 공약이자 상수(常數)였습니다.
각자도생의 시대, 2026년 생존 방정식
현대차의 4조 원 시가총액 증발은 단순한 어닝 쇼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한미 동맹'이라는 안보 자산이 경제 영역에서는 더 이상 무료가 아님을 선언하는, 트럼프 2.0 시대의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청구서입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물건을 사주는 너그러운 소비 시장이 아니라, 자국 내 투자를 강요하고 일자리를 요구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가차 없이 관세라는 징벌을 내리는 냉혹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변모했습니다.
2026년, 한국 기업에 주어진 생존 방정식은 잔혹하리만큼 단순합니다.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에서 벗어나, 기술적 초격차(Super-gap)를 통해 미국조차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거나, 미국 이외의 시장에서 독자적인 생존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서 우리가 가진 기술적 우위는 여전히 유효한 협상 카드입니다. 그러나 이 카드의 유효기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기술 추격은 턱밑까지 쫓아왔고, 미국은 자국 내 공급망 완결을 위해 인텔과 같은 자국 기업에 천문학적인 지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텍사스와 인디애나에서 겪고 있는 보조금 지급 지연과 노동 규제 갈등은 기술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정치 리스크'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결국,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만이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동시에 '탈(脫)미국'을 포함한 과감한 시장 다변화가 요구됩니다. 인도와 아세안(ASEAN),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생존 지대가 되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이들 신흥 시장 간의 경제 블록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현대차가 인도 법인 상장을 통해 현지화 전략을 강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읽은 선제적 대응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정부의 역할 또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생존 전략을 짤 수 있도록 규제를 혁파하고, 기업이 감당해야 할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정교한 '리스크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제공해야 합니다. 통상 교섭력을 총동원하여 우리 기업에 가해지는 불합리한 차별을 방어하는 '방패' 역할에 충실해야지, 기업을 앞세워 외교적 성과를 포장하려는 시도는 멈춰야 합니다.
'서울 쇼크'는 예고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2026년의 한국 경제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어 그들의 경제 논리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독자적인 기술과 시장을 가진 진정한 경제 주권 국가로 거듭날 것인가. 현대차 사태가 남긴 4조 원의 손실보다 더 뼈아픈 것은,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성공 공식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