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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동차 산업 73년 만의 추락: '전략적 후퇴'인가, 구조적 몰락인가

AI News Team
영국 자동차 산업 73년 만의 추락: '전략적 후퇴'인가, 구조적 몰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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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의 망령과 텅 빈 조립 라인

영국의 유서 깊은 자동차 공업 단지, 웨스트 미들랜즈(West Midlands)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수십 년간 끊이지 않던 프레스 기계의 육중한 진동과 용접 로봇의 불꽃이 멈춘 자리에는 이제 낯선 적막만이 감돌고 있다. 영국 자동차공업협회(SMMT)가 확정한 2025년 영국의 연간 자동차 생산량은 약 71만 7천 대. 이는 '영국병(British Disease)'이 태동하던 시기이자 수에즈 운하 위기가 세계를 강타했던 1956년 이후 73년 만의 최저치다. 단순히 숫자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산업의 기초 체력 자체가 증발했다는 우려가 런던 금융가(The City)와 산업 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현지 부품 공급망에서 일하는 최수진(가명) 씨는 "과거에는 라인 하나가 서면 다른 라인이 그 물량을 메웠지만, 지금은 공장 전체가 몇 달씩 셧다운(Shutdown) 되는 일이 예사"라고 증언했다. 런던 인근 물류 센터에서 한국계 배터리 부품을 관리하는 최 씨는 "전기차 전환을 위한 설비 교체라고는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문을 닫는 것 아니냐'는 고용 불안감이 팽배하다"며 현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전했다. 100만 대 생산이라는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지 오래인 상황에서, 이제는 70만 대 선마저 위태롭다는 사실은 제조업 강국을 자부하던 영국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기차 전환'이라는 완벽한 알리바이

영국 자동차공업협회(SMMT)가 2025년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꺼내 든 방패는 '계획된 후퇴'라는 논리다. 마이크 호스(Mike Hawes) SMMT 회장은 "전기차(EV)와 제로 탄소 기술로의 전환을 위한 필수적인 투자 기간"이라고 방어했다. 닛산의 선덜랜드 공장이나 BMW 미니(Mini)의 옥스퍼드 공장이 내연기관 라인을 걷어내고 전기차 전용 설비를 까느라 생산이 일시적으로 급감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알리바이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서울의 여의도나 울산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멈춤'은 치명적인 안일함으로 비친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은 1분 1초를 다투는 속도전이다. 현대차그룹이나 중국의 BYD가 생산 라인을 멈추지 않고 '혼류 생산' 방식을 통해 내연기관과 전기차를 동시에 쏟아내며 시장 점유율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동안, 영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내부 수리를 한 셈이다. 영국이 숨을 고르는 사이, 2026년 영국 도로 위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상하이에서 선적된 가성비 높은 중국산 전기차들이다. 이는 단순한 생산 차질이 아니라, 시장 주도권의 영구적인 상실을 의미할 수 있다.

영국 자동차 생산량 추이 (2020-2025)

브렉시트의 긴 그림자와 트럼프 2.0의 파고

산업 전문가들은 1956년의 위기가 지정학적 쇼크였다면, 2025년의 위기는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브렉시트(Brexit) 이후 복잡해진 원산지 규정(Rules of Origin)과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설비 투자 기간이 길어질수록 영국의 제조 경쟁력은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다.

특히 2026년 현재, 트럼프 2.0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자동차 산업, 특히 프리미엄 브랜드인 재규어 랜드로버(JLR)의 최대 수출국 중 하나는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약대로 수입차에 대한 보편적 관세를 강화하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을 자국 생산분에 한정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영국 자동차 산업은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런던 정경대(LSE)의 한 경제학 교수는 최근 기고문에서 "지금의 71만 7천 대는 바닥이 아니라, 추락하는 과정의 한 지점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붕괴되는 생태계: 멈춰 선 토끼의 비극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산업 생태계의 붕괴 위기다. 완성차 업체(OEM)들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1~2년의 '보릿고개'를 버틸 체력이 있지만, 그들에게 부품을 납품하는 2차, 3차 협력사들은 사정이 다르다. 주문량이 1950년대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황에서, 영세한 부품사들은 현금 흐름이 막혀 도산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영국 중부 웨스트 미들랜즈에서 20년 넘게 자동차 부품을 납품해 온 박성민(가명) 씨는 최근 공장 가동률을 60%대로 줄였다. 그는 "과거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는 데 서류 한 장이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수십 장의 통관 서류와 막대한 물류 비용이 필요하다"며 "독일이나 프랑스 바이어들이 복잡한 행정 절차를 이유로 거래처를 동유럽으로 옮기고 있다"고 토로했다. 부품 공급망이 한번 무너지면, 나중에 설비 투자가 완료되어도 차를 조립할 나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해외를 떠돌아야 할지 모른다. 이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전형적인 '고통의 외주화'이자, 산업 생태계 차원의 붕괴를 의미한다.

울산과 화성을 위한 반면교사

결국 71만 7,000대라는 숫자가 한국 자동차 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전동화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생산의 연속성'과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직된 전환은, 단순한 실적 부진이 아니라 산업 기반 자체의 붕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기존 라인과 전기차 라인을 유연하게 혼류 생산하거나, 가동 중단 없이 별도의 전용 공장을 증설하며 '달리면서 바퀴를 갈아 끼우는' 전략을 택한 것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증명되는 순간이다.

영국의 사례는 기술 전환기일수록 '속도'가 생존의 절대 조건임을 역설한다. 생산 공백기에 시장을 방어할 완충지대(Buffer) 없이 전면적인 라인 교체를 단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1956년의 영국은 재건을 꿈꾸는 희망의 시기였지만, 2026년의 영국은 제조업 공동화(Hollowing out)라는 벼랑 끝에 서 있다. 과연 영국 자동차 산업은 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전히 달릴 수 있는 트랙이 남아있을 것인가. 텅 빈 조립 라인이 던지는 침묵의 질문은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