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깃발의 투항: 베네수엘라 석유 민영화와 트럼프 2.0 시대의 냉혹한 거래

2026년 1월 30일 오후, 카라카스 미라플로레스 궁(Palacio de Miraflores)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델시 로드리게스(Delcy Rodríguez) 대통령 권한대행이 쥔 몽블랑 만년필 끝에서, 지난 25년간 베네수엘라를 지탱해 온 '볼리바르 혁명'의 척추가 소리 없이 부러졌습니다. 그녀가 서명한 '탄화수소 기본법 개정안(Reform of the Hydrocarbons Law)'은 단순한 법률 수정을 넘어선 체제 전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국영석유회사 PDVSA가 모든 석유 합작 투자에서 반드시 과반 지분(51%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는,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성역처럼 지켜온 '자원 주권' 조항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상 베네수엘라 경제의 심장인 오리노코 벨트(Orinoco Belt)의 빗장을 미국과 유럽의 석유 메이저들에게 활짝 열어젖힌 '백기 투항' 선언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입각한 가혹한 에너지 제재와 고율 관세 위협은 결국 마두로 정권의 잔존 세력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워싱턴의 계산서는 냉정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산 원유에 대한 시장 접근권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서방 기업의 경영권 보장과 수익 송금의 완전한 자유, 즉 '약탈적 개방'을 요구했습니다. 로드리게스의 서명은 이 굴욕적인 청구서에 대한 최종 결재였습니다.

혁명의 붉은 깃발이 내려간 거리에는 달러만이 유일한 신앙으로 남았습니다. 카라카스 차카오(Chacao) 지구에서 20년째 식료품점과 환전소를 운영해 온 페드로 곤살레스(가명) 씨는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치솟는 물가와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려온 그는 "차베스는 석유가 인민의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굶주렸다. 이제 석유가 셰브론(Chevron)의 것이 된다면, 적어도 빵은 살 수 있지 않겠나"라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이념적 패배감보다 생존의 절박함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는 1997년 대한민국이 IMF 외환위기 당시 겪었던 '경제 주권 상실'의 트라우마를 기시감처럼 떠올리게 합니다. 국민의 자존심보다 당장의 '민생(民生)' 해결이 급선무인 현실이 베네수엘라를 자본주의의 가장 거친 정글로 밀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를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닌, 정권 생존을 위한 '관리된 파산(Managed Bankruptcy)'으로 규정합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BCV)의 외환보유고가 사실상 바닥난 상태에서, 국부 유출을 막을 제도적 방패는 사라졌습니다. 국제 에너지 시장 분석가들은 이번 개방이 정상적인 투자 유치가 아닌, 부채 탕감을 위한 '헐값 매각(Fire Sale)'이 될 가능성을 경고합니다.
PDVSA 독점의 해체: 국가라는 껍데기만 남다
카라카스의 스카이라인을 뒤덮었던 '차비즈모(Chavismo·차베스 주의)'의 붉은 구호들이 2026년의 태양 아래서 빛바래 가고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 텍사스와 유럽의 거대 석유 메이저들의 로고입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 PDVSA(Petróleos de Venezuela, S.A.)가 헌법처럼 수호하던 '자원 주권'은 이제 트럼프 2.0 시대의 강력한 에너지 패권주의와 마두로 정권의 생존 본능이 맞물린 타협점 위에서 소리 없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과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석유는 인민의 것"이라며 외국 자본을 몰아내고 PDVSA를 사회주의 혁명의 엔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오리노코 벨트의 풍경은 사실상 '조용한 민영화'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PDVSA가 51%의 지분을 보유한 합작투자(Joint Venture) 형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경영권과 수익의 실질적 통제권은 이미 서방 기업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닙니다. 국가 부도라는 벼랑 끝에 몰린 정권이 통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자산을 담보로 내놓은 '자본주의적 투항'에 가깝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대(對)베네수엘라 전략은 1기 때의 '최대 압박'과는 결이 다릅니다. 이념적 적대감보다는 철저한 실리를 추구하는 '거래적 고립주의'가 핵심입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산 중질유가 텍사스의 정유 시설로 흘러들어와 유가를 안정시키기를 원하며, 그 대가로 미국 기업들이 현지에서 배타적인 운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승인을 내렸습니다. 이에 호응하듯 마두로 정권은 '반봉쇄법(Anti-Blockade Law)'이라는 법적 우회로를 통해 외국 기업과의 계약 조건을 기밀에 부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계약들이 의회의 감시조차 받지 않은 채 밀실에서 처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지 에너지 시장에 정통한 박지훈(가명) 컨설턴트는 "현재 PDVSA 본사에는 결정권자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는 "채굴부터 정제, 수출에 이르는 핵심 의사결정은 사실상 셰브론(Chevron)이나 렙솔(Repsol) 같은 파트너사들이 주도하고 있다"며,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제 석유를 생산하는 주체가 아니라, 외국 기업으로부터 세금과 배당금을 수취하는 '지주(Landlord)' 역할로 전락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과거 베네수엘라가 그토록 비판하던 신자유주의적 자원 수탈 구조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량 및 PDVSA 직접 운영 비중 변화 (추정)
위 차트는 베네수엘라의 전체 원유 생산량이 회복세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PDVSA가 직접 운영하고 통제하는 생산량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생산량 증가는 곧 외국 자본의 지배력 확대를 의미하는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트럼프 2.0의 그림자: 제재 완화라는 달콤한 독
2026년 1월의 카라카스는 묘한 활기로 들썩이고 있지만, 그 활기의 원천은 과거 차베스 시절의 '볼리바르 혁명' 구호가 아닌, 서방 오일 메이저들의 복귀가 만들어낸 달러의 흐름입니다. 트럼프 2.0 행정부 출범 이후, 백악관은 베네수엘라에 대해 지극히 실리적이고 거래 중심적인 접근을 취해왔습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의 제재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압박 수단이었다면, 트럼프 2.0의 제재 완화는 철저한 '에너지 패권'과 '물가 안정'을 위한 계산서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선회는 마두로 정권에게는 '달콤한 독'과 같습니다. 국가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 정권의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바로 '미국 자본의 유입'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 PDVSA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시추, 정제, 수출 등 핵심 운영권은 합작 투자(Joint Venture)라는 명목 하에 서방 기업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는 우리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겪었던 국부 유출 논란을 연상케 하지만, 그 강도는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자원은 더 이상 '인민의 것'이 아니며, 정권 유지를 위해 글로벌 자본에 헐값으로 넘겨진 담보물이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원유 대미 수출량 추이 및 전망 (2023-2026)
한국 경제에 던지는 파장: 유가 변동성과 에너지 안보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호수의 녹슨 시추선이 다시 가동된다는 소식은 지구 반대편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밤 풍경까지 바꿀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카라카스의 '자본주의적 투항'은 단순한 남미의 정치 변동을 넘어, 한국 경제의 생명줄인 에너지 안보 지형을 뒤흔드는 거대한 변수입니다. 2026년 1월 현재, 트럼프 2.0 행정부가 주도하는 '에너지 패권주의' 아래서 베네수엘라산 중질유(Heavy Crude)의 귀환은 한국 정유 및 석유화학 업계에 기회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불확실성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국 정유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화 설비를 갖추고 있어, 값싼 중질유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정제하는 데 탁월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베네수엘라산 '메레이(Merey)' 원유의 시장 유입은 국내 정유사의 마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의도 증권가의 시각은 신중합니다. 여의도 소재 대형 증권사 에너지 담당 이준호(가명) 연구원은 "시장은 베네수엘라의 공급 확대보다 트럼프 행정부의 '배급권' 행사에 주목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허가증(License) 없이는 한 방울도 들여올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과연 셰브론 등이 선점하고 남은 물량이 한국까지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량 전망 및 한국 수입 영향 (2024-2027)
또한, 베네수엘라 인프라 재건을 위한 플랜트 시장 역시 '그림의 떡'이 될 공산이 큽니다. 카라카스 현지의 박지훈 부장(국내 종합상사 주재원)은 "이미 미국 기업들이 주요 유전의 개보수 공사를 독식하는 분위기"라며, "한국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하청(Sub-contract)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대했던 '제2의 중동 특수'가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 장벽에 막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카라카스는 '반미(反美)'라는 붉은 깃발을 내리지 않은 채, 뒷문으로는 월스트리트의 '검은 황금' 사냥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이 위험한 동거는 단기적으로는 정권의 연명을 가능케 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대외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권'을 담보로 한 대출, 그것이 지금 카라카스가 선택한 생존 방식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이를 '거래의 기술'이라 부르겠지만,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는 미래를 저당 잡힌 '채무의 굴레'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