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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유령과 침묵의 카르텔: 2023년의 고백, 2026년의 정의를 묻다

AI News Team
바그너의 유령과 침묵의 카르텔: 2023년의 고백, 2026년의 정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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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2023년의 악몽

2023년 4월, 세계는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전 지휘관, 아자마트 울다로프와 알렉세이 사비체프가 쏟아낸 고백에 경악했다. "5~6세 정도 된 소녀를 쏘았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바흐무트와 솔레다르의 전장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그들의 육성은 단순한 전투 행위가 아니라, 인간성의 말살을 지시받은 조직적인 전쟁 범죄의 생생한 증거였다. 당시 국제사회는 즉각적인 분노로 들끓었다. 유엔은 조사를 촉구했고, 각국 정상들은 '책임자 처벌'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순간만큼은 정의가 살아있는 듯했고, 전쟁의 광기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합의가 견고해 보였다.

그러나 2026년 1월 현재, 그 뜨거웠던 분노는 어디로 증발했는가. 3년이라는 시간은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국제 정세의 급변은 명백한 악(惡)조차 '협상의 카드'로 변질시켰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 우선주의'가 부활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정의의 구현'이 아닌 '비용과 이익'의 대차대조표 위에서 계산되고 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오가는 물밑 대화 속에, 5세 소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그날의 진실은 거추장스러운 걸림돌 취급을 받고 있다.

국제법을 전공하며 인권 단체에서 활동 중인 김서연 씨(가명)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깊은 무력감을 토로했다. 대학원에서 '보편적 인권'과 '전범 재판의 역사'를 배웠던 김 씨는 최근 뉴스에서 바그너 그룹 관련 소식이 사라진 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2023년에는 모두가 그들의 자백을 '결정적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마치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힘 있는 나라들이 국익을 위해 눈을 감으면, 학살자들도 애국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소름 끼칩니다." 그녀의 지적처럼, 바그너의 유령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외교적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증발해버린 증인들, 멈춰선 시계

2023년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기이한 반란과 뒤이은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터져 나온 바그너 그룹 이탈자들의 증언들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학살, 고문,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 그들의 자백은 단순한 양심선언이 아니라 국제법정이 푸틴 정권과 그 하수인들을 단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Smoking Gun)'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26년 1월 오늘, 그토록 시끄러웠던 목소리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지금 '증거의 증발'이라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바그너의 유령들이 사라지는 방식은 치밀하고도 노골적이었다. 러시아 내부는 물론 제3국으로 도피했던 증언자들조차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의문사, 갑작스러운 실종, 혹은 "조국을 위한 속죄"라는 명분하에 다시 최전선인 '고기 분쇄기(Meat Grinder)'로의 강제 투입. 이 모든 과정은 국제사회의 감시망이 느슨해진 틈을 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의 이익이 아닌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기조를 확고히 하면서, 인권 감시를 위한 미국의 정보 자산과 외교적 압박이 현저히 줄어든 탓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서울의 한 국제인권단체에서 전쟁범죄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이지현 팀장(가명)은 최근 자신의 암호화된 데이터베이스를 열어보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우리가 확보했던 'A급 증인'은 1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명령 체계와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하기로 약속했던 바그너 전 지휘관급 인사들이었죠. 하지만 2026년 현재, 이들 중 생존 신호가 확인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마지막 생존자였던 한 명마저 지난달 텔레그램 접속이 끊겼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마비와 한계

헤이그의 평화궁(Peace Palace)은 여전히 웅장하지만, 그 안에서 작동해야 할 국제 사법 시스템은 2026년 현재, 사실상 '식물 상태'에 빠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3년 4월, 바그너 그룹 전직 지휘관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아동 살해를 육성으로 자백했을 때, 전 세계는 이것을 전쟁 범죄의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이 명백한 증거들은 법정의 기록이 아닌, 인터넷 서버 어딘가를 떠도는 디지털 유령으로 남았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침묵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정의를 집행할 수단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미국이 보여준 자국 우선주의와 국제 기구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는 ICC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과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은 비록 ICC 회원국은 아니었으나 러시아의 전쟁 범죄 조사에 정보를 공유하며 우회적으로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2026년의 워싱턴은 다르다. "미국 주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국제 재판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ICC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이는 국제 사회의 공조 약화로 이어졌다.

김철수 한국외대 국제학부 교수(가명)는 "ICC의 가장 큰 무기였던 '국제적 수치심(Name and Shame)'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2023년의 자백 영상은 법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지만, 이를 기소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피의자 신병 확보라는 물리적 강제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어떤 국가도 에너지 패권과 안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범죄자를 체포해 헤이그로 보낼 의지가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정의가 국익이라는 계산기 앞에서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트럼프 2.0 시대, 인권보다 국익

워싱턴의 겨울은 춥고 건조하다. 2026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중반을 향해가는 시점에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국제 사회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지탱하던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있다. 2023년 바그너 그룹 용병들이 토해냈던 학살의 고백들이 2026년 현재에 이르러 공허한 메아리로 남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시대,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인권이 외교적 거래의 대상이 되는 '신(新)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다.

제네바 주재 국제기구에서 활동해 온 김서연 씨(가명)는 최근의 변화를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표현했다. 김 씨는 "과거에는 미국 대표단이 인권 이사회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이며 타국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하지만 트럼프 2.0 체제가 들어선 이후, 미국의 관심사는 오로지 해당 국가가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협조적인지, 혹은 에너지 안보에 기여하는지에 쏠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러한 '거래적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의 부상은 한국과 같은 중견국에 심각한 딜레마를 안긴다. 박준호 교수(가명)는 이를 '국제적 갑질의 제도화'라고 진단하며, "과거에는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도덕적 평판을 의식해 전쟁 범죄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조사를 요구했다"면서, "지금은 힘센 자가 약한 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국익을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포장되는 시대"라고 꼬집었다.

진실의 비용: 우리는 왜 침묵하는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비용 절감'의 결과일 수 있다. 2024년과 2025년을 거치며 전 세계를 강타한 고물가와 에너지 위기는 도덕적 분노를 사치재로 전락시켰다. 시민들은 생활 물가에 민감하게 반응할지언정, 먼 타국의 학살에는 피로감을 느낀다.

주요 글로벌 미디어 키워드 언급량 변화 (2023 vs 2026)

실제로 최근 한 국제 인권 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G7 국가 언론에서 '전쟁 범죄(War Crimes)' 키워드의 노출 빈도는 2023년 대비 60% 이상 급감한 반면, '공급망 안정(Supply Chain Stability)'은 200% 이상 증가했다. 이는 2023년의 고백이 2026년에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남은 것이 단순히 러시아의 문제만이 아님을 시사한다. 불편한 진실을 덮고서라도 당장의 안락함과 경제적 수치를 지키려는 국제 사회 전체의 암묵적 합의가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기록된 죄악, 지워지지 않는 책임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영장이 힘을 잃었다는 비판이 2026년의 외교가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법의 논리를 압도하는 작금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세상에서 기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가?

서울의 한 국제 인권 NGO에서 분쟁 지역 증언을 번역하고 아카이빙하는 박지훈 연구원(가명)은 "처벌은 법의 영역이지만, 기억은 존엄의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당장 그들을 단죄할 수 없다 해도, 이 기록들이 살아있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범죄자'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법적 심판이 요원해진 시대에 기록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정의를 유예하고 보존하는 '타임캡슐'이 된다.

정의의 지연이 정의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기억의 연대'다. 2023년의 고백을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2026년의 기술로 그 증거들을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 훗날 국제 질서가 다시 이성을 되찾았을 때, 이 기록들은 그들을 단죄할 결정적 근거가 될 것이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기록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