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무덤 흑해: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과 각자도생의 시대

2026년 오데사, 침묵이 웅변하는 공포
2026년 1월의 오데사 항구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합니다. 예년 같으면 흑해의 거친 파도를 뚫고 나가는 곡물 수송선들의 뱃고동 소리와 크레인이 삐걱거리는 금속음으로 가득 찼을 시간이지만, 지금 부두를 채우는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뿐입니다. 워싱턴에서 날아온 '지원의 청구서'가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트럼프 2.0 행정부가 출범 직후 선언한 "미국 국익이 없는 안보 보장은 없다"는 기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흑해의 수평선을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미 해군의 정기적인 순찰이 제공하던 '보이지 않는 방패'가 사라지자, 글로벌 해상 보험사들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전쟁 위험 구역에 대한 보험료율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고, 이는 사실상의 해상 봉쇄로 이어졌습니다. 항구 근처 화물 터미널에서 만난 물류 관리자 올렉산드르 씨(가명)의 표정은 흑해의 잿빛 하늘을 닮아 있었습니다.
"2년 전만 해도 미국과 서방의 깃발이 보이면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러시아의 기뢰인지, 튀르키예의 순찰선인지, 아니면 그냥 텅 빈 바다인지."
그의 말처럼 2026년의 흑해는 더 이상 '서방의 호수'가 아닙니다. 미국의 전략적 후퇴가 만든 거대한 진공 상태를 채우는 것은 자유무역의 원칙이 아닌, 힘의 논리입니다. 텅 빈 수평선은 평화가 아니라, 다가올 폭풍전야의 침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데사의 멈춰진 크레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동맹의 선의에 기댄 안보와 경제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보호막이 걷혔을 때 우리가 마주할 '진짜 비용'은 얼마인지 말입니다.

폰토스의 기억: 제국은 영원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거칠고 변덕스러운 바다를 '폰토스 엑세이누스(Pontus Axenus)', 즉 '인색한 바다'라 불렀다가, 훗날 기원을 담아 '폰토스 욱세이누스(Pontus Euxinus, 환대하는 바다)'로 고쳐 불렀습니다. 조지타운 대학의 찰스 킹(Charles King) 교수가 그의 저서 『흑해: 탄생과 비극의 역사』에서 통찰했듯, 흑해는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문명이 만나고 충돌하며, 때로는 융합되는 거대한 용광로이자 '변경(frontier)'이었습니다.
2026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표방하는 급진적인 고립주의와 이에 따른 흑해 내 미국의 전략적 후퇴는 이러한 2,500년 역사의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워싱턴의 외교 정책 수정이 아닙니다. 이는 로마, 비잔틴, 오스만, 그리고 제정 러시아가 그러했듯, 외부의 패권 세력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다 결국 물러나고 지역의 전통적인 맹주들이 그 공백을 메우는 역사적 주기의 반복입니다.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뒤에서 흑해를 '로마의 호수'로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이 거친 바다가 영원히 황제의 발치에 머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흑해의 파도가 단 한 번도 특정 세력에게 영구적인 안식을 허락한 적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오스만 제국 역시 약 300년 동안 흑해를 내해로 기능하게 했으나,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북진과 함께 그 독점적 지위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세종연구소 등 국내외 안보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역사적 주기성은 오늘날 흑해에서 놀라운 정밀도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름다운 고립'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의 공백을, '강한 러시아'의 재건을 꿈꾸는 크렘린과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며 지정학적 중재자를 자처하는 튀르키예가 빠르게 잠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2.0과 '부재의 지정학', 그리고 맹주의 귀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출범 1년을 넘기며 본격화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이제 유라시아 대륙의 안보 지도 자체를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기류는 명확합니다. "미국의 국익과 직결되지 않는 전쟁에 더 이상 달러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흑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미국의 '의도적 부재(Intentional Absence)'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공백을 파고드는 것은 튀르키예와 러시아입니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후예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균형추가 사라진 틈을 타, 흑해를 그들만의 내해(內海)로 만들려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 러시아: 서방의 제재가 장기화되면서 흑해를 생존을 위한 경제적 '폐(肺)'로 재정의했습니다. 크림반도의 불침항모화를 넘어 곡물 항로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회복하고, 에너지·식량 무기화 전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 튀르키예: 1936년 몽트뢰 협약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흑해의 수문장 역할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정부는 나토 회원국이라는 지위와 러시아와의 밀월 관계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며, '푸른 조국(Mavi Vatan)' 교리를 흑해 전역으로 투사하고 있습니다.
2026 흑해 주요국 영향력 지수 변화 (추정치)
위 차트가 보여주듯, 2026년 흑해에서의 해상 통제권과 무역 레버리지는 서방에서 지역 맹주들로 급격히 이동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급감한 반면, 튀르키예는 무역 레버리지에서 압도적인 수치를 보이며 흑해의 '통행료 징수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튀르키예'의 적대적 공생 관계는 흑해를 거대한 '가스 밸브'이자 '곡물 창고'로 만들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튀르키예를 경유한 러시아산 에너지에 다시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흑해의 경고: 한반도는 안전한가
흑해의 거친 파도가 2026년 한반도의 서해안까지 밀려오고 있습니다. 흑해 연안 국가들이 겪고 있는 '안보 진공' 사태는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반도 국가 대한민국에게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닙니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이었던 흑해 소국들이 지역 맹주들의 영향력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은, 70년 넘게 굳건하다고 믿어왔던 한미 동맹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불안은 실물 경제 현장에서 가장 먼저 감지됩니다. 부산항에서 동유럽 물류를 담당하는 해운사 임원 박성훈 씨(가명)는 "2년 전만 해도 미 해군의 존재 자체가 해상 보험료의 안정판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전쟁 위험 할증료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며, "흑해 루트의 불확실성은 곧바로 국내 곡물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박 씨의 우려처럼, 흑해발(發) 물류 리스크는 한국의 밥상 물가와 건설 자재비에 '보이지 않는 세금'을 매기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흑해의 교훈이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흑해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강대국의 선의에 기댄 평화는 그들의 국익 계산서가 바뀌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의 파격적인 인상을 요구하며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쥐고 흔드는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힘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각자도생 시대의 생존법
역사는 결코 진공 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거대한 방파제가 사라진 후, 흑해는 다시금 힘과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생의 숲으로 회귀했습니다. 19세기 크림 전쟁이 열강들의 쇠락과 부흥을 갈랐듯, 2026년의 흑해는 단일 패권의 종언과 다극 체제의 무질서한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한국과 같은 통상 국가에게 다극화 시대의 생존법은 '스스로 파도를 타는 법'을 익히는 데 있습니다. 흑해 국가들이 보여주는 생존법은 명확합니다. 어느 한쪽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유연함, 그리고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레버리지로 삼아 강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대담함입니다.
결국 흑해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그러나 모두가 탐내는 '폰토스'의 본질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탈은 흑해가 다시금 유라시아 대륙의 화약고이자 교차로라는 본연의 지위를 회복했음을 알리는 서막입니다. 제국의 무덤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강한 자가 아니라, 변화하는 물결을 가장 먼저 읽고 돛의 방향을 튼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념적 명분이 아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무장한 '극단의 실용주의'입니다. 파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파도를 넘을 수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