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없는 대학의 서막: 한양대, 상하이에서 '브레인 허브'를 띄우다

상하이의 선언: 친목을 넘어 생존 전략으로
2026년 1월 28일, 상하이 푸동 지구의 한 컨퍼런스 홀. 창밖으로는 황푸강의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행사장 내부의 공기는 통상적인 신년 하례회의 들뜬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와인 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파열음 대신, '산학 협력', '공동 연구', '글로벌 평판 관리'라는 묵직한 의제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습니다. 한양대학교가 국내 대학 최초로 해외 동문 조직을 단순 친목 모임에서 실질적인 싱크탱크로 격상시키는 실험, ‘중국동문회 미래전략위원회’가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이기정 한양대 총장을 비롯해 본부 핵심 보직자들과 상하이 및 화동 지역에서 활약 중인 50여 명의 정예 동문이 집결했습니다. 이들의 면면은 단순한 '졸업생'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중국 빅테크 기업의 수석 엔지니어, 상하이 시정부 자문역을 맡고 있는 도시계획 전문가, 그리고 한중 크로스보더 벤처 투자를 주도하는 금융인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과거의 동문회가 '향수(鄕愁)'를 공유하는 자리였다면, 이날 출범한 미래전략위원회는 대학의 '생존'을 모의하는 비상 대책 회의에 가까웠습니다.
단상에 오른 이기정 총장은 "학령인구 급감과 재정 위기라는 이중고 속에서, 대학이 캠퍼스 담장 안의 자원만으로 생존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이어 "이제 동문회는 모교에 대한 기부를 독려하는 후원 조직을 넘어, 대학의 연구 역량과 현지의 산업 수요를 연결하는 '두뇌 허브(Brain Hub)'로 진화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대학의 외연을 물리적 캠퍼스에서 전 세계 동문이 있는 곳으로 확장하겠다는, 이른바 '글로벌 영토 확장' 선언이었습니다.

학령인구 절벽과 트럼프 2.0: 닫힌 문을 여는 열쇠
한양대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2026년 현재, 한국 대학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방증합니다. 통계청과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학령인구(만 18세 기준)는 급격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대학 미충원 인원은 해가 갈수록 치솟고 있습니다. '인구 지진'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지방대를 넘어 수도권 대학의 재정 건전성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등록금 동결 기조 장기화로 인해 대학들은 더 이상 내부적인 비용 절감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국내 대학 학령인구 추이와 대학 미충원 인원 예측 (2020-2030)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외 환경 또한 녹록지 않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 이후 심화된 자국 우선주의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국가 간 공식적인 학술 교류 채널마저 좁히고 있습니다. 미국 내 중국계 연구자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양국 간 학술 교류가 경색된 틈바구니에서, 한국 대학들은 샌드위치 신세가 될 위험과 새로운 기회를 동시에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각자도생'의 시대에 대학이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나 톱다운 방식의 교류에만 의존해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입니다.
‘차이나 브레인 허브’: 인적 네트워크의 자산화
한양대가 띄운 승부수는 '차이나 브레인 허브(China Brain Hub)'입니다. 이는 해외 동문 조직을 단순한 친목 도모가 아닌 실질적인 ‘지적 자본(Intellectual Capital)’으로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출범한 ‘중국동문미래전략위원회’의 핵심 축은 중국 내 주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거나 국책 연구소에 재직 중인 54명의 ‘학자 그룹’입니다. 이들은 모두 한양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자리 잡은 지한파(知韓派) 엘리트로, 대학 측은 이들을 현지 R&D 거점의 핵심 노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거 대학들의 해외 동문회가 기부금 유치나 유학생 유치의 보조적 수단에 머물렀다면, 미래전략위는 궤를 달리합니다. 위원회에 소속된 동문 교수들은 각자의 소속 대학에서 한양대와의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현지의 우수 연구 인력을 한국으로 연결하는 ‘학술 파이프라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물리적 캠퍼스를 짓지 않고도 중국 내 유수 대학들의 연구 인프라와 인적 자원을 공유하는 가상의 ‘확장 캠퍼스’를 구축하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베이징의 한 이공계 대학에서 재직 중인 리웨이(가명) 교수는 “미국 유학이나 교류가 까다로워진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학술 파트너이자 서구 학계로의 교두보”라며 “미래전략위는 단순한 동문 모임을 넘어 한·중 연구 생태계를 잇는 실핏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국경 없는 연구실: 분산형 R&D 시스템의 부상
이러한 네트워크의 실질적인 작동 기제는 ‘분산형 공동 연구 시스템’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과거에는 해외 연구자를 국내로 초빙하거나 학생을 파견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현지 기업 및 대학에 포진한 동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연구 노드를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선전(Shenzhen)의 하이테크 단지에서 자율주행 알고리즘을 연구하는 정민우(가명) 씨는 한양대 본교 연구진과 클라우드 기반의 가상 실험실에서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공유하며 협업합니다. 그는 "미국 주도의 기술 규제가 심화되면서 아시아권 대학 간의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 구축이 절실해졌다"며, "동문 네트워크는 서로의 기술적 장벽을 낮추고 민감한 지식재산권(IP) 공유를 논의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통로"라고 설명합니다.
교육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외 거점 네트워크를 보유한 대학의 국제 공동 연구 논문 비중은 일반 대학 대비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국내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의 질적 하락 우려를 글로벌 인재 풀로 상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국내 주요 대학의 국제 공동 연구 논문 비중 추이 (출처: 교육부 고등교육 통계 및 2026 추정치)
과제와 전망: '보여주기'를 넘어선 실질적 가치 창출로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장밋빛 미래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브레인 허브’가 대학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높습니다. 단순히 위원회라는 간판을 다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공동 연구 예산 확보와 구체적인 협력 메커니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여느 보여주기식 조직과 다를 바 없는 용두사미로 끝날 공산이 큽니다.
또한, 국내 대학 연구 환경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이들 해외 동문 연구자들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학내 인식의 전환 없이는 ‘허브’가 아닌 ‘일방적 통로’에 그칠 위험도 상존합니다. 지방 소재 사립대 관계자는 "동문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싶어도, 연락이 닿는 해외 동문 자체가 적은 대학에는 그림의 떡"이라며 대학 간의 양극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글로벌 네트워크에서도 재현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양대의 이번 실험은 학령인구 절벽 시대에 대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본질이 교육과 연구라면, 그 영토는 캠퍼스 담장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양대가 쏘아 올린 ‘차이나 브레인 허브’가 한국 대학의 글로벌 영토 확장을 위한 유효한 전략 자산이 될 수 있을지, 교육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