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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한파 뚫은 '이건희 컬렉션': 워싱턴 6만 인파가 던진 침묵의 메시지

AI News Team
반도체 한파 뚫은 '이건희 컬렉션': 워싱턴 6만 인파가 던진 침묵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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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겨울을 녹인 6만 개의 시선

2026년 1월,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몰아친 칼바람은 매서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과 동시에 선포한 ‘보편적 기본 관세’와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 소식에 한국 상무관실의 불은 꺼질 줄 몰랐지만, 불과 몇 블록 떨어진 미국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ational Museum of Asian Art) 앞의 열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영하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컬렉션: 한국 미술의 여정’ 전시를 보기 위해 늘어선 줄은 박물관 모퉁이를 돌아 스미스소니언 성(Smithsonian Castle) 인근까지 길게 이어졌습니다.

박물관의 잠정 집계에 따르면 개막 후 한 달간 방문객은 6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아시아 기획 전시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으로, 현지에서는 ‘K-아트’의 저력을 다시 보게 된 계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대학원생 박지현 씨(가명)는 "워싱턴의 지인들 사이에서 한국 미술은 이제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반드시 알아야 할 '세련된 취향'으로 통한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강화 이후 한국에 대한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향한 미국 시민들의 태도는 오히려 더 진지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의 역설은 차가운 통상 지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2026년 초,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가 미국 상무부의 정밀 타격 대상이 되면서 한미 관계는 유례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전시장을 가득 채운 고구려의 기개와 조선 백자의 절제미는 미국 정가와 시민 사회에 한국이 단순한 '공장 국가'가 아닌, 깊은 역사적 층위를 지닌 '문화 강국'임을 침묵 속에 웅변합니다. 이는 대미 외교의 전선이 통상 본부의 협상 테이블을 넘어 박물관의 고요한 복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K-팝의 소음 너머, '정적의 미학'이 통했다

지난 수년간 세계를 휩쓴 K-컬처의 본진이 화려한 퍼포먼스와 중독성 강한 비트의 'K-팝'이었다면, 2026년 트럼프 2.0 시대의 심장부에서 목격된 현상은 분명 결이 다릅니다. 자극과 도파민이 지배하는 디지털 과부하의 시대, 미국 주류 사회가 한국의 '여백'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워싱턴 현지에서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박준형 씨(가명)는 "과거 K-팝 행사장이 10대와 20대 위주의 열광적인 분위기였다면, 이번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는 상원 의원 보좌관, 씽크탱크 연구원, 로비스트 등 소위 'D.C. 이너서클'의 방문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 장벽으로 인한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한 조선 백자의 담백함이 이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전시장 내 달항아리(Moon Jar) 앞은 관람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입니다. 완벽한 대칭을 거부하고 찌그러짐마저 예술로 승화시킨 달항아리의 미학은, 1나노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반도체 전쟁의 숨 막히는 긴장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한국은 초격차 기술의 나라이기 이전에, 불완전함을 포용할 줄 아는 철학의 나라"라고 평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단순한 미술품 감상을 넘어,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문화적 품격(High Culture)'을 갖춘 선진국으로 인식 구조가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반도체 겨울의 그림자: 지속 가능한가?

그러나 6만 명의 관람객이 보낸 찬사 뒤에는 우리가 직시해야 할 서늘한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문화적 승리가 혹시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화려함은 아닌지,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입니다.

트럼프 2.0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기조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유례없는 한파를 몰고 왔습니다. 워싱턴의 외교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이 보여준 한국의 품격을 논하지만, 불과 몇 블록 떨어진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에서는 한국 기업에 대한 보조금 축소와 추가 관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시 경제의 충격은 국내 산업 현장의 모세혈관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경기도 화성시의 반도체 장비 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이정훈 대표(가명)는 "워싱턴에서 우리 문화재가 호평받는다는 뉴스를 보면 가슴이 벅차면서도, 당장 다음 달 직원들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야속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한국 기업들이 처한 '메세나(Mecenat)의 딜레마'를 정확히 관통합니다. 이건희 컬렉션은 고(故) 이건희 회장 시절, 한국 기업이 글로벌 초격차를 유지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유산입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주요 대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습니다.

국내 10대 그룹 문화예술 후원 규모 추이 (2023-2026)

위 차트가 보여주는 급격한 하락세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지금 워싱턴에서 보여주고 있는 소프트파워는 과거의 축적된 자산, 즉 '저량(Stock)'에 의존한 것입니다. 반면, 미래의 소프트파워를 창출할 '유량(Flow)'인 현재의 투자는 말라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댐의 수위는 아직 높아 보이지만, 상류에서 유입되는 물줄기가 끊긴 상황과 흡사합니다.

진정한 선진국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서강대 경제학과 박철민 교수(가명)는 "트럼프 2.0 시대의 불확실성을 헤쳐나갈 유일한 비관세 장벽은 결국 매력 자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반도체는 가격 경쟁력에 따라 대체재를 찾지만, 문화적 팬덤은 가격 탄력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충성 고객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5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적 호감도 상승이 한국 제품 구매 의향을 15% 이상 끌어올리는 낙수 효과가 입증된 바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공급망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과 예술이라는 두 개의 날개로 안정적인 비행을 할 것인가. 1997년 외환위기가 제조업 중심의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면, 2026년의 복합 위기는 '소프트 파워'를 하드 파워와 동등한 안보 자산으로 격상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관람객들이 달항아리 앞에서 느낀 그 고요한 울림은, 어쩌면 수십 조 원의 무역 흑자보다 더 강력한 외교적 언어일지 모릅니다. 반도체는 낡으면 폐기되지만, 문화유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의 반도체 신화가 아니라, 기술 강국이라는 차가운 금속성 이미지 위에 입혀질 따뜻한 문화적 온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