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의료 붕괴의 그늘: 분산형 호스피스, 혁신인가 위험한 떠넘기기인가

'암 난민'이 사라지지 않는 지역의 현실
경남 산청군에 거주하는 박영순 씨(74·가명)의 하루는 진통제 투여 시간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말기 췌장암 진단을 받은 박 씨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3개월. 가족들은 그가 익숙한 집에서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기를 원했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인근에는 입원형 호스피스 병동이 전무했고, 가정형 호스피스를 제공하는 기관은 차로 1시간 30분 거리인 진주시에 위치한 대학병원이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박 씨의 딸 최지은 씨는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 불가를 통보받고 내려왔지만, 고향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마치 난민처럼 떠돌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는 비단 박 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정작 생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지킬 인프라는 수도권에 기형적으로 쏠려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병원 객사율은 70%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우리는 평생을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데 바치고 정작 생의 마지막 순간은 낯선 기계음과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상 위에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수도권 집중화는 의료 영역, 그중에서도 수익성이 낮은 호스피스 분야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호스피스 병상 중 40% 이상이 서울과 경기, 인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면, 지방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는 경남 서부권이나 경북 북부권 등은 인구 10만 명당 호스피스 병상 수가 수도권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담장 넘은 암 센터, '분산형 호스피스'의 실험
이러한 맥락에서 경상국립대병원이 시도하고 있는 '분산형 호스피스' 모델은 절박한 지역 의료 현실에 대한 자구책으로 등장했습니다. 권역 책임의료기관인 대학병원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실제 환자 관리는 지역의 보건소나 1차 의료기관이 분담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거점 병원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중앙집중식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이 모델은 이상적입니다. 환자는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고,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응급 환자에 집중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경상국립대병원은 전문적인 호스피스 교육과 자문을 제공하고, 지역 보건소는 환자의 일상을 돌보는 손발 역할을 맡습니다. 2025년 하반기 시범 운영 결과, 재가 암 환자의 응급실 방문 횟수가 전년 대비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보고는 '찾아가는 관리'가 사회적 비용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2025년 권역별 인구 100만 명당 호스피스 병상 수 격차 (출처: 보건복지부)
이상과 현실의 괴리: 보건소는 준비되었는가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는 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큰 뇌관은 '인력'입니다. 지역 보건소는 이미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경남 의령군의 한 보건지소에서 근무하는 김미경 주무관(가명)은 "기존의 만성질환 관리, 예방접종, 방역 업무에 더해 호스피스 환자의 통증 관리와 임종 케어까지 맡기에는 현재 인력 구조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합니다.
특히 전문적인 완화의료 교육을 받지 못한 보건소 인력에게 고도의 심리적, 의학적 케어가 필요한 말기 암 환자를 맡기는 것이 과연 '지역사회 중심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위험한 책임 떠넘기기'는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6년 정부의 긴축 재정 기조와 맞물려 지방 공공의료 예산은 제자리걸음인 반면, 초고령화로 인한 치매 관리, 방문 건강 등 보건소의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호스피스 업무가 더해진 것은, 이미 짐을 가득 실은 트럭에 코끼리를 태운 격입니다.
더욱이 '마약류 관리법'의 엄격한 규제는 현장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족쇄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를 지역 보건소 의료진이 관리하거나 대리 처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의료 사고나 분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은 고스란히 현장 방문 간호사에게 전가될 위험이 큽니다.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 케어'를 위한 제언
결국 '분산형 호스피스'가 지역 소멸 시대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선 근본적인 자원 배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상급종합병원의 노하우와 인력이 지역 사회로 실질적으로 흘러들어가게 할 유인책 없이, 단순히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행정적 성과에만 매몰된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의료 갑질'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주창하는 '상생(Win-win)'이 예산 절감을 위한 '각자도생'의 포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구조가 지속될 경우, 보건소가 '지역 사회 통합 돌봄의 허브'가 되기는커녕 '의료 난민의 종착지'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대한가정의학회의 최근 보고서는 "상급종합병원과 보건소 사이를 잇는 촘촘한 '허리' 역할이 부재하다"고 지적하며, 지역 내 1, 2차 의원급 의료기관이 호스피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가 체계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