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대가 1조 원: 폭스 뉴스-도미니언 합의가 한국 언론에 던지는 경고
세기의 재판, 1조 원의 마침표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Wilmington)의 법원 앞, 전 세계 미디어와 법조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내려진 결론은 판사가 내리친 법봉의 소리가 아닌, 양측 변호인단의 긴박한 합의 발표였습니다. 2023년 4월, 폭스 뉴스(Fox News)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Dominion Voting Systems)에 지급하기로 합의한 금액은 무려 7억 8,750만 달러. 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약 1조 1,0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이는 미국 명예훼손 소송 역사상 언론사가 지불한 합의금 중 단일 건으로는 최대 규모로 기록되었으며,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조차 '고의적인 거짓' 앞에서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1조 원의 청구서는 단순한 배상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실을 외면하고 알고리즘과 확증 편향에 기생해온 현대 미디어 산업 전체에 울리는 거대한 경종이었습니다.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의 증명: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세기의 합의가 성사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미국 언론법의 핵심 개념인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64년 연방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 이후 정립된 이 법리는, 공인이나 공적 기관이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승소를 하려면 언론사가 보도 내용이 허위임을 사전에 인지했거나, 진실 여부에 대해 심각한 부주의(reckless disregard)를 저질렀음을 원고가 증명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이는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설정된 매우 높은 법적 장벽입니다.
그러나 도미니언 측은 폭스 뉴스의 방어벽을 무력화할 치명적인 증거, 즉 '스모킹 건(Smoking Gun)'을 확보했습니다. 재판 전 증거 개시 절차(Discovery)를 통해 공개된 폭스 뉴스 내부의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간판 앵커인 터커 칼슨(Tucker Carlson), 션 해니티(Sean Hannity) 등은 방송에서는 도미니언의 투표 조작 의혹을 부추겼지만, 사석에서는 이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 터커 칼슨: "트럼프 측의 주장은 미친 소리다. 믿을 수가 없다." (2020년 11월)
-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 폭스 회장): "선거 사기 주장은 정말 끔찍한 헛소리(Really crazy stuff)다."
이들의 내밀한 대화는 그들이 '진실'을 몰라서 오보를 낸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시청률과 수익을 위해 거짓을 팔았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팩트체크를 시도한 자사 기자를 해고하려 하거나, "진실을 보도하면 주가가 떨어진다"고 우려하는 경영진의 대화는 저널리즘의 원칙이 자본 논리에 어떻게 종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왜 판결 대신 합의를 택했나?
폭스 뉴스 입장에서 1조 원은 뼈아픈 손실이지만, '회사 존폐의 위기'를 막기 위한 보험료에 가까웠습니다. 폭스 뉴스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배심원단의 평결보다 '공개 법정에서의 증언' 그 자체였습니다.
만약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루퍼트 머독 회장을 비롯해 간판 앵커들이 줄줄이 증언대에 서야 했습니다. 법정에서 이들이 선서 후 위증의 위험을 무릅쓰고 쏟아지는 심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은 폭스 뉴스라는 브랜드 신뢰도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라는 변명은 저널리즘 윤리 강령 앞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도미니언 입장에서도 합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기업은 이념이 아닌 이익을 쫓습니다. 1조 원은 즉각적이고 확실한 보상입니다. 만약 승소하더라도 폭스 뉴스는 즉각 항소할 것이 확실시되었고, 항소심과 대법원까지 이어지는 지난한 법정 공방은 수년이 걸릴 수 있었습니다. 도미니언의 CEO 존 풀로스는 합의 직후 "진실은 중요하다(Truth matters)"라고 일갈했습니다. 판결문이라는 종이 조각 대신, 폭스 뉴스의 금고를 열어 1조 원을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징벌이자 명예 회복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거짓의 대가: 폭스 뉴스 합의금과 주요 재무 지표 비교 (단위: 백만 달러)
한국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 '가성비' 좋은 선동의 종말
폭스 뉴스가 지불한 7억 8,750만 달러는 폭스 코퍼레이션의 연간 순이익의 절반을 훌쩍 넘는 금액이며, 당시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현금성 자산의 약 20%에 해당합니다. 이는 단순한 사과 방송이나 정정 보도 한 줄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가짜 뉴스(Fake News)'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의 미디어 환경은 폭스 뉴스의 상황과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유튜브를 위시한 뉴미디어의 범람 속에 확인되지 않은 '설'들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소위 '사이버 렉카'들이 혐오를 돈으로 환전하고 있습니다. 기성 언론 역시 확증 편향에 빠진 독자들을 붙잡기 위해 선정적 보도 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법적 현실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한국은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 제도가 매우 제한적이며, 언론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 위자료 인정액은 통상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수준, 즉 '커피값' 혹은 '껌값'에 불과합니다. 언론사가 허위 보도로 얻는 트래픽 수익이 배상금보다 훨씬 크다면, 가짜 뉴스는 사라지지 않는 '남는 장사'가 됩니다.
폭스 뉴스 합의금 규모와 한국 주요 미디어사 연간 영업이익 비교 (단위: 억 원, 2022년 기준 추정치)
폭스 뉴스의 사례는 **"거짓말이 회사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비싸질 때, 비로소 진실이 보호받는다"**는 자본주의적 교훈을 역설합니다. 한국 정치권에서 논의되던 '언론중재법 개정안'이나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논의가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디어의 미래: 신뢰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폭스 뉴스는 도미니언과의 합의로 급한 불은 껐지만, 더 큰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또 다른 투표 시스템 업체인 **스마트매틱(Smartmatic)**이 제기한 27억 달러(약 3조 7,000억 원) 규모의 소송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미니언보다 훨씬 더 큰 사업 규모를 가진 스마트매틱의 소송은 폭스 뉴스에게 '1조 원의 합의'가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AI와 알고리즘이 뉴스를 큐레이션하고 생산까지 하는 시대에, 인간 기자의 역할은 더욱 역설적으로 중요해집니다. 폭스 뉴스 내부의 문자 메시지들이 공개되면서 드러난 것은, 그들이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시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기 위해 진실을 덮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알고리즘이 추구하는 '체류 시간 극대화' 목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인간 저널리스트가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클릭 수를 쫓을 때, 저널리즘은 사망 선고를 받습니다.
미디어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에 달려 있습니다. 1조 원이라는 수업료를 내고 배운 교훈은 명확합니다. 신뢰는 쌓는 데 평생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며, 다시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한국 언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진영 논리에 갇힌 독자들의 입맛을 맞추는 '서비스업'으로서의 유혹을 뿌리치고, 불편한 진실이라도 기꺼이 보도하는 '공공재'로서의 소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독자에 대한 예의이자, 미디어 기업으로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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