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의 청구서: 영국의 '전쟁 채권' 부활이 K-방산에 보내는 신호

'애국 금융'의 귀환: 안보를 팝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회색빛 복도에서 1940년대의 유령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영국 자유민주당(Lib Dems)이 제안한 200억 파운드(한화 약 34조 원) 규모의 '안보 채권(Security Bonds)' 발행 계획은 단순한 야당의 정치적 수사가 아닙니다. 이는 서구권 경제가 오랜 기간 누려왔던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자, 재무장(Rearmament)을 위한 치열한 유동성 확보 전쟁의 서막입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우리가 이 런던발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 '애국 금융(Patriot Finance)'의 부활이 한국의 방산 수출 포트폴리오에 미칠 파급력이 실로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재무부(HM Treasury)의 최근 재정 보고서가 경고하듯, GDP 대비 100%에 육박하는 공공 부채와 정체된 조세 수입으로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자국 군 현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불가능합니다. 에드 데이비(Ed Davey) 당수가 "자유를 위한 투자가 곧 경제를 위한 투자"라며 채권 발행을 촉구한 이면에는, 전통적인 긴축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실존적 안보 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 투자자들에게 이 상황은 1998년 우리의 '금 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우리가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장롱 속의 금을 꺼냈다면, 지금 영국은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국민의 지갑을 열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런던 정경대(LSE)의 국방 경제학 분석에 따르면, 이 200억 파운드의 유동성이 시장에 풀릴 경우 가장 즉각적인 수혜를 입을 수 있는 곳은 생산 라인이 포화 상태인 서구 방산 기업이 아니라, '즉시 전력화'가 가능한 K-방산 기업들입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나 현대로템과 같은 한국 기업들에게 영국의 이러한 유동성 확보 움직임은 기회이자 동시에 엄중한 경고입니다. 기회는 명확합니다. 영국이 확보한 자금은 결국 실물 무기로 교환되어야 하며, 유럽의 생산 라인은 이미 2028년 물량까지 차 있습니다. 반면, 경고는 거시경제적 차원에 있습니다. 서구권 주요국들이 잇따라 국채 발행을 통해 군비 경쟁에 뛰어들 경우, 글로벌 채권 금리 상승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이는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경제의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영국 국방 예산 부족분 대비 안보 채권(Patriot Bonds)의 기여도 예측 (2026)
위 차트는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2026년 영국 국방 예산의 현주소입니다. 붉은색 막대로 표시된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제안된 200억 파운드의 채권 수익은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영국 국방의 생명줄(Lifeline) 역할을 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 자금이 실제로 집행될 때, 그 돈의 흐름이 창원과 사천의 공장으로 향할지, 아니면 런던의 금융가에서만 맴돌지는 우리 기업들의 수주 전략과 외교적 민첩성에 달려 있습니다.
1945년의 향수, 2026년의 현실
"애국심만으로는 이자율을 이길 수 없다."
2026년 1월의 런던 시티(City of London), 살얼음판 같은 채권 시장을 지켜보던 한 헤지펀드 매니저의 일갈입니다. 1940년대, 윈스턴 처칠이 "피와 땀과 눈물"을 호소하며 발행했던 '전쟁 채권(War Bonds)'은 국가의 생존이라는 강력한 담보가 있었기에 연 3%의 저금리에도 영국 국민들의 지갑을 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Keynes)가 설계한 전시 재정은 강제 저축과 금리 통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면서 전비를 조달하는 '마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2026년의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만난 한화자산운용의 방산 담당 펀드매니저는 "지금 글로벌 자본은 '애국'이나 '명분'이 아니라 철저히 '수익률(Yield)'을 쫓아 움직인다"고 지적합니다. 영국 재무부가 검토 중인 이른바 '신(新) 국방 채권'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하는 캠페인이 아니라, 현재 연 4% 중반을 상회하는 시장 금리(Gilt yields)보다 확실한 프리미엄을 얹어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수치로 본 딜레마: 3%의 향수와 4.8%의 현실
역사는 차가운 숫자로 이 현실을 증명합니다. 영국 통계청(ONS)의 과거 데이터와 2025년 말 영란은행(BoE)의 금리 보고서를 교차 분석해보면, 1945년 당시 영국 정부는 시장을 통제하며 실질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영국 국채 시장은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라 불리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감시 아래 놓여 있습니다. 정부가 빚을 내어 무기를 사려 할 때마다 시장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며 응징합니다.
영국 국채 금리 비교: 1945년 vs 2026년 (추정)
이 1.8%포인트 이상의 격차(Spread)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K-방산의 주요 고객인 영국과 유럽 국가들이 한국산 K9 자주포나 천무를 구매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추가 금융 비용'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KEXIM) 해외경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경고했듯, 유럽 국가들의 조달 금리 상승은 장기적으로 대규모 무기 도입 프로젝트의 지연이나 축소, 혹은 '지불 능력(Solvency)'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뇌관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역설적으로, 압도적인 '가성비'와 '납기 준수' 능력을 갖춘 한국 방산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줍니다. 서구권 정부가 고금리 부담에 허덕일수록, 비싼 자국산 무기보다 효율적인 'K-웨폰'을 선택할 명분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창원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공장에서 생산되는 자주포가 런던의 채권 시장 금리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2026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전쟁 채권의 새로운 경제학'입니다.
유럽의 '현금 가뭄'과 K-방산 커넥션
영국 런던의 금융가에서 흘러나오는 전쟁 채권 논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지금 재무장을 위한 청구서를 감당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의 '카드 돌려막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가 선언한 '시대전환(Zeitenwende)'의 핵심인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방위기금(Sondervermögen)**은 사실상 헌법상의 채무 제동 장치를 우회하기 위한 '마이너스 통장'에 불과합니다. 2027년 이후 이 기금이 고갈되었을 때 독일 연방군이 겪을 재정적 절벽에 대한 뚜렷한 대책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 극적인 상황은 K-방산의 최대 '큰손'인 폴란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2026년 국방비 지출을 GDP의 4.7%까지 끌어올리며 나토(NATO) 회원국 중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의 속사정은 복잡합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폴란드는 한국 측에 막대한 규모의 **금융 지원(Vendor Financing)**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주주들이 반드시 주시해야 할 '청구서의 뒷면'입니다. 수출 실적이라는 숫자에 가려진 '신용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럽의 유동성 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기업들에게는 '낙수 효과'가 아닌 '분수 효과'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의 2025년 하반기 방산 섹터 보고서는 이를 "유동성의 동진(Eastward Shift of Liquidity)"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유럽의 방산 기업들이 생산 라인을 확충하는 데 3~5년이 걸리는 동안, 한국은 '납기 준수'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이 자금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한 생산 라인 책임자는 "유럽에서 송금된 선수금이 공장 증설의 시멘트가 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영국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 수익금의 흐름을 추적해보면, 그중 상당 부분이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거쳐 한국 방산 3사의 결제 계좌로 향하고 있습니다. 안보 불안에 떠는 동유럽 국가들에게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단순한 성격 급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고의 솔루션이 된 셈입니다.
유럽 국방비 증액과 K-방산 대유럽 수출 추이 (단위: 억 달러)
하지만 이 호황 뒤에는 경고음도 존재합니다. 메리츠증권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이 발행한 채권의 이자 부담이 가중될수록, 추가 발주의 지속 가능성은 불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현금 흐름은 단순한 기업 실적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불안과 재정 위기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서방 세계의 '급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울의 딜레마: 빚인가, 의무인가
런던과 베를린의 고민은 곧 서울의 고민으로 치환됩니다. 영국의 전쟁 채권 발행 움직임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안보 비용은 누가,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K-방산의 수출 호황이라는 화려한 불꽃놀이 아래, 우리는 이제 청구서를 누구 앞으로 돌릴지 사회적 합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인구 절벽'이라는 상수(常數) 탓에 더 복잡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는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세수(稅收)만으로 고도화되는 북핵 위협과 K-방산의 첨단화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나 KAI가 해외에서 수조 원대 잭팟을 터뜨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 군의 전력 증강을 위한 지갑은 얇아지고 있는 '풍요 속의 빈곤'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K-방산 채권(K-Defense Bond)' 도입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징병제 국가인 한국에서 국방 채권은 '투자'를 넘어선 '이중 과세'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만난 30대 직장인 박민석 씨의 "이미 청춘을 바쳐 복무했고 세금도 내는데, 노후 자금으로 미사일까지 사라는 것이냐"는 반문은 이 정책이 넘어야 할 높은 심리적 장벽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시장의 논리는 냉정합니다. 국방 예산의 자연 증가분과 세수 감소분이 교차하는, 이른바 '데스 크로스(Death Cross)'가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재정 가위표: 국방 비용 증가 vs 납세자 감소 전망 (지수: 2020=100)
위 그래프가 보여주는 거대한 가위표(scissors) 모양의 간극을 메울 방법은, 결국 빚(국채) 아니면 뼈를 깎는 증세뿐입니다. 영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미리 도착한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애국심'에 호소하는 채권이든, 고통스러운 증세든, 누군가는 반드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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